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불관계 (문단 편집) === [[광복]] 후 === [[1949년]] [[2월 15일]]에 [[대한민국]]과 정식으로 [[수교]]했다. 1949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는 단 3곳([[미국]], [[영국]], [[중화민국]])에 불과했고, 1948년 12월 12일의 '''[[유엔 총회]] 결의안 195호'''가 한국-프랑스 수교의 결정타로 작용했다.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UN군]] 자격으로 [[랄프 몽클라르]] 장군[* 실제로는 [[중장]] 계급이었으나 당시 참전한 부대가 대대급이라 [[중령]]으로 계급을 일부러 낮추고 참전했다. (물론 UN군 장성들은 그를 원래 계급인 [[중장]]으로 대우해 주었다.)]을 필두로 전투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한반도]]의 [[적화통일|전체 공산화를]] 막아내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베트남]]처럼 더운 나라겠지, 하고 베트남 주둔군 일부를 한국에 보냈다가 추위에 기겁하고 방한용품을 부랴부랴 공수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갔을 때 추위에 대한 대비를 안 했다가 쫄딱 망한 거랑 비슷한 예. 1965년에는 양 정부가 '한·불 문화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73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아주대학교]]와 [[유신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970년대 [[에어버스]]가 여객기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 첫 제품으로 내놓았던 것이 [[A300]]. 그러나 당시 A300은 유럽 바깥에선 거의 주문이 없다시피하여 사업 자체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국방부가 [[엑조세]] 도입 사업을 벌이려 하자 [[프랑스 정부]]는 A300을 곁다리로 파는 딜을 제안했고 한국 정부와 [[대한항공]]이 이를 받아들여 A300이 1976년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대한항공은 A300을 아주 잘 굴려서[* 가까이는 [[김포]]-김해/제주 국내선, 일본 [[대만]] [[홍콩]] 노선부터 멀리는 일본경유 [[하와이]]행이나 홍콩 [[방콕]] 경유 [[중동]] [[유럽]]노선까지 전천후로 뛰었다.] 에어버스 여객기 판매 규모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980년 이후 한국 혈액관리본부는 프랑스를 [[CJD]] 발병 국가로 지정해 1980년 이후 프랑스에서 5년 이상 거주하거나 체류한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평생 [[헌혈]]을 할 수 없다.[* 때문에 프랑스로 망명을 했다가 돌아온 [[홍세화]]는 평생 헌혈을 하지 못하며 [[황의조]]도 2024년까지 프랑스에 체류하면 이렇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프랑스는 ㅍ으로 시작하고 모음까지 ㅡ인 탓에 후반부에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프랑스 뒤에 입장한 나라는 피지, 핀란드, 필리핀, 헝가리, 홍콩, 대한민국 단 6개국이다. 1990년대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도 유명한 일화. 당시 신칸센 300계와 독일 ICE가 TGV랑 경합했고 정부의 선택은 TGV였다.[* 그 TGV를 모티브로 삼은 차량이 현재 [[KTX-1]]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