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한나라]]가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고 이듬해 (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사기(역사책)|사기]]에서부터 한사군의 설치가 언급되지만 각 군의 이름은 명확히 등장하지 않으며, 고조선 땅에 설치한 한사군의 명칭이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해 인접한 요동군 출신을 관리로 데려왔다.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고 왕망 때까지만 해도 우리 기록에서도 고구려 병사들을 징병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왕망에 반발하여 대항한 연비가 대패하여 목이 잘리거나 그에 응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고구려인들이 공격해서 습격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실제로 한나라의 법률을 적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燕郡][br][br]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만듦.]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서』권28하, 「지리지」8하 연군] 한사군 중 임둔군[*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며 이에 대해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진번군 2군이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어 주변 군현에 흡수통합하고 현도군은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군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옛 임둔군 지역인 '영동 7현'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군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협박에 데꿀멍하는 기록, 초기 [[백제]]와 [[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금속 가공)|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낙랑군)|왕조]](王調)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 사실상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서기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 왕조가 세운 독립 낙랑은 마침 내분이 일어나 군삼로 왕굉(王閎)이 군결조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살해하고 왕준을 맞이해 5년만에 싱겁게 멸망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한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드라마 [[자명고]]는 이 설을 따른다.] 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군|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현도군]] 공격 등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져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요동 공손씨 정권|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과 [[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요동 공손씨는 조조가 낙랑태수로 보낸 [[양무]]를 억류하는 등 낙랑을 자기 세력권에 두었다. 204년 요동의 지배자 [[공손강]]이 [[후한]] [[헌제]] 건안 연간(196년 ~ 220년) 낙랑군 둔유현 (황해도 황주) 이남의 땅을 분할시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대방군 설치의 배경을 살펴보면 후한 말 군벌 세력이었던 공손강은 자립하면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고 했는데 당시 한반도 제종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낙랑군의 영역과 군사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점점 낙랑군이 반 독립화하던 중이었는데, 공손강의 대방군 신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던 목적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반 독립화하는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해[* 대방왕(흔히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에 비정)이 백제에게 자신의 딸을 보내 혼인 동맹을 한 것도, 공손도가 후한의 낙랑태수 파견을 막은 것도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대방군을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힐 수 없었다는 점과 낙랑군의 교역 확대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방 정권이던 공손씨 정권의 한계로 보인다. 이렇게 요동 공손씨 군벌이 낙랑을 지배하다가 [[3세기]] 중엽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사마의]]가 [[고구려]]와 연합해 [[공손연]]의 요동을 공격, 멸망시켰다. 공손씨가 지배하던 한사군도 유주자사 [[관구검]]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대차게 깨졌다. 이후 [[양맥 전투]]에서는 고구려가 승리하기는 하지만 많은 피해를 입어 300년경까지는 더 이상 적극적인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위나라 치하에서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낙랑군 소속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 실수로 인해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는 [[기리영 전투]]가 벌어졌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이들을 토벌했는데, 궁준은 전사했지만 한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비유적 표현이다. 마한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국 하나 혹은 여러 개를 멸망시켰다고 본다. 현재는 선빵을 날린 국가는 마한 북부의 소국인 [[신분활국]]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외에 [[백제|백제국]]으로 추정하는 설, 마한 중심국인 [[목지국]]과 여러 소국으로 보는 설 등도 있다. 사실 대방태수가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만만치 않은 수준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백제 [[고이왕]] 13년(246년)의 기록[*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 대방태수를 잘못 기록한 듯)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 본기 고이왕 13년]과 결부시키기도 하나, 시기가 다르고, 침략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아닌 듯 하다.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이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한방 얻어맞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사실 [[백제]]와 낙랑은 [[온조왕]] 때부터 불편한 관계였는데 온조왕 초반기엔 그럴듯한 관계였지만 백제가 힘이 세지자 낙랑군이 [[위말갈]]을 꼬셔 백제를 공격하게 하는 등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중국 본토와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위(삼국시대)|위나라]]를 뒤엎고 건국된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적극적으로 동방에 개입하려 했다. 동이교위가 동방 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 대방, 현도는 점점 세력이 쇠퇴해 가며, 그 사례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과 [[진한]]은 더이상 과거처럼 한사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지 않고 270년대부터는 마한과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의 서진에 직접 나아가 통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의 [[삼국통일]] 이후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290~300년대부터 한사군과 중국 본토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다시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과거 위나라에 패했던 피해를 수습한 고구려는 다시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서안평은 현재의 [[단동]]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압록강]] 건너편이 [[신의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공략이 힘든 곳이다'''. 결국 [[미천왕]] 시절인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축출되었고,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고구려의 정복 직전에 탈출한 낙랑인 세력 1천여 가는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이 모용씨 [[전연|연나라]] 치하에서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즉 이 시기부터 한사군은 요서에 있게 된다. 이 요서의 한사군은 그 전 원래 한사군에서 간판만 가져온 것이지만,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주장하는 자칭 재야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가지고 한사군이 원래부터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사군 자체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것이므로 결국 이들의 주장은 고조선부터가 원래 대륙 안쪽에 있었다는 [[대륙설]] 근거로 갖다붙이는 것이다. 대륙설 항목 참조]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이글루스 블로거 [[http://xakyntos.egloos.com/tag/%EB%82%99%EB%9E%91%EA%B5%B0/page/1|'야스페르츠'의 글]]을 참조하였다.] 한편 고구려가 정복한 옛 한 군현 땅에 남아있는 유민도 많았고, 한 군현이 무너졌다고 해서 400년 간 이어진 중국계의 인구나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한나라의 세력들을 군사적으로만 아니라 결혼 등을 통하여 외교적[* 본토와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이간질을 하기도 했다. ]으로도 흡수하고 다녀서 2세기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는 백제와 비슷한데 백제도 [[근초고왕]] 대에 마한 일대를 무력으로 느슨하게 복속시키지만 직접 지배를 관철하지 못하고 한반세기 지난 무령왕 대 즈음 들어서야 마한을 온전히 흡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