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석봉 (문단 편집) == 평가 ==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 및 [[안진경]]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했을 만큼 호평했고, 당대에는 한호 이전 송설체의 대가 [[안평대군]]과 맞먹는다는 평가 또한 있었다. 안평대군, 한호 외에 성종~중종 대의 문신 신자건(愼自健)을 더해 '조선 시대 송설체 3대가'로 꼽히기도 한다. 반면 [[김생]], 탄연(坦然), [[최우]](무신정권의 집권자), [[유신]] 등 신품4현(神品四賢)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긴 했다. 송도삼절(松都三絶)[* 해당 송도삼절은 흔히 황진이가 포함되는 삼절(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가 아닌 [[김만중]]이 분류한 것으로 차천로(시), 한호(글씨), 최립(문장)을 묶는 표현이다.]로 손꼽혔던 간이당(簡易堂) 최립(崔笠)과는 이종 육촌 관계이다. 최립의 문집 《[[간이집]]》에는 최립이 한호의 서첩(書帖)에 써준 서문( <한경홍서첩서韓景洪書帖序>)가 있다. 최립의 고조인 최로는 [[최윤덕]]의 큰 동생 최윤복(崔潤福)의 손자로 통천 최씨 세보에 의하면 최로는 최립의 고조부가 아니라 5대조로 1대 차이가 있다. 최로가 [[세조(조선)|세조]] 때 글씨를 잘 써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상호군(上護軍)의 관직에 해당하는 녹식을 받았고 [[계유정난]] 때 사망하였으며 단종의 능인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족조(族祖) 직강공 최영(崔永) 부자와 아버지 최자양이 과거 시험장에서 글씨가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한국어 위키의 '최립' 항목에는 최영이 증조부로 나왔지만, 최립은 <한경홍서첩서>에서 분명히 족조(族祖)라고 적었다. '족조'는 저자 본인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자 본인 '집안의 할아버지', 더 정확히는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촌수인 할아버지를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로→최유지→최상→최세영→최자양→최립의 가계로 설명하고, 최영은 최유지의 아들, 즉 최상과 형제 간으로 되어 있다. 최립의 형제 명곡 최석정이 지은 묘갈 〈형조참판간이최공묘갈명〉(刑曹參判簡易崔公墓碣銘)은 '아버지 최자양, 할아버지 최세영, 증조 최상'으로 기록했고, 조선왕조실록사전 DB에도 이 설을 따르므로 확실히 최영과 최립은 직계 조손 관계는 아닌 듯하다.] 최립이 한호의 서첩(書帖)에 써준 서문(<한경홍서첩서韓景洪書帖序>)에는 한석봉이 직강공의 외손자로 외가의 필체를 이어받은 것 같다.'는 집안 자랑이 있다. 뒤에는 대놓고 아예 '한호가 유학자 집안이긴 한데 명필은 없었음.'이라고 적었다. ~~집안 자랑 겸 한씨 디스~~ 나름 한호의 서체의 원류가 무엇인가를 참조하는 중요한 서술이긴 한데, 문제는 최립이 지목한 최로, 최영 부자, 최자양의 글씨가 남아있질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영의 아들은 최담(崔湛)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정구(李廷龜)가 쓴 한호의 묘갈명에 '최담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을 참고한 듯한데, 정작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간이집]]》 해제(한국고전종합DB 해제 참조)에는 최영과 최담의 항렬 관계는 알 수 없다 설명했다. 통천 최씨 세보를 직접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한석봉이 정교한 글씨체로 조선의 사자관체를 확립했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좀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선조(조선)|선조]]는 "비록 액자(額字)[* 현판 글을 가리킨다. 그림틀 액자(額子)가 아니다!]에는 능하지만, [[초서]]와 [[예서]]는 특장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한석봉을 총애하던 선조 자신도 당대의 명필로 유명해서 명나라 관리들이 선조가 쓴 해서나 초서 글씨를 좀 얻어 갔다.[* 야사인 공사견문록에서 소개된 일화 중에는 환관 한명이 선조의 글씨체를 보고 베껴서 사용하다가 [[이준경]]에게 걸려 크게 갈굼을 당하고 글씨체를 바꿔 해당 일을 뒤늦게 알게된 선조가 환관의 반성하는 태도에 기뻐했었던 일이 있다.] 이는 중국의 유명한 문인 왕세정이 한석봉의 글씨를 극찬한 것을 이항복에게 듣고 난 이후의 반응인데, 한석봉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 필법을 가지고 극찬을 했다고 하니 진실되지 못한 칭찬이라 의심한 것.[* 왕세정은 글은 매우 잘 쓰지만 인성에 대해서는 많이 까이는 인물이었다.] 또한 글씨가 부족하다고 깠다기보다 가장 큰 장점이 아니라고 했으니 뉘앙스도 다르다. 실제로 선조는 한석봉의 글씨를 매우 아꼈다. [[김정희]]는 "글씨를 워낙 많이 써 그 공력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정도지만 동기창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평했다. 김정희는 동기창의 작품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었으니 이 말도 가려서 들을 일이다. 동기창은 명의 관리로 예술적 재능이 걸출해서 시서화(詩書畫)에 통달했으나,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사후에 백성들이 그 집을 태우고 가산을 적몰했다. 사실 이쪽 업계에서는 쓴 사람의 인물평도 나름대로 하나의 평가 요소이다. 특히 가격 형성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안중근]]의 글씨는 높이 쳐 주고 거래도 함부로 할 수 없으나 [[이완용]]은 글씨 잘 쓴다고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동기창도 사실은 호불호가 매우 많이 갈리는 서예가. 행정을 말아먹은 것으로만 따지면 [[이완용]]과 비슷한 작자로 볼수도 있지만 인성으로는 그나마 이완용보단 나은데다 서예 실력이 국보급따위로는 표현 불가능한 급으로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 취급이라도 받는 것. 게다가 석봉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지나칠 정도로 '정석'이기 때문에 찍어낸 듯한 활자체 같다는 것도 문제다. 개성이 없어 '재미가 없다.'는 것이 중평이며, 오랜 사자관 생활로 인해서 공문서에 특화된 서체라 예술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다. 그러나 '정석'이라는 이유로 평가가 떨어지는 건, 어디까지나 타자로 누구나 쉽게 '정석'적인 글씨를 쓸 수 있는 현대에서나 가능한 평가이다. 즉 활자체의 희소성이 떨어지니까 한석봉 글씨체의 감흥도 낮아진 것일 뿐이다.[* 비유컨대, 사진기 발명 이후 회화에서 '시각의 정확한 재현'의 희소성이 급락한 것과 유사하다.] 손글씨가 당연하던 시대에는 정석적이고 반듯한 글을 즉석에서 슥슥 써내려가는 한석봉의 재주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날엔 손글씨가 '감수성'의 영역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공문서를 비롯한 온갖 영역에서 '실무'의 영역이었고, 당연히 가독성이 좋고 정석적인 한석봉의 글씨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한석봉의 글씨체가 그만큼 '정석'에 가까운 만큼 한석봉의 글씨체는 이후 국가 문서의 표준 서체를 확립했고, 컴퓨터나 교과서에서 쓰이는 현대 서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석봉이 정석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너무 잘 써서 정석이 된 거다.''' 서예를 배웠던 사람은 알겠지만, 활자체같이 쓰기도 참 어렵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이 느껴지게 하는 특유의 강건한 서체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한자 서체이다. [[한글과컴퓨터]]에서 출시한 문서 편집 프로그램 시리즈들의 한문 서체로도 익숙할 것이다.[[https://m.fmkorea.com/best/612144688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