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성 (문단 편집) === [[고구려]]의 3경 중 하나 === 고구려의 수도권인 [[패서]] 지역에 속하는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인근으로 비정된다.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수도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설치됐다. 여기는 고구려에서 많이 개발된 지역이면서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중국이나 [[신라]]의 직접적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 당의 공격은 [[요동]]과 [[청천강]] 일대가 위주였고, 신라와의 전선은 [[임진강]] 유역에서 형성돼 있다가 고구려 말기에 내분이 일어나 [[연정토]] 등이 남부 방어선을 통째로 바치고 항복해 668년 신라군은 별 저항 없이 중간지역을 순조롭게 건너뛰고 평양 근처까지 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쭉 안전한 후방이었다.] 사회적, 군사적 기반이 고구려 영토 중에서 비교적 안정돼 있었고, 따라서 초토화된 다른 지방보다는 주로 여기서 고구려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안승]]과 [[검모잠]]이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통일신라]]가 차지했고 패서에서 거주하던 기존의 고구려인들 외에도 각지에서 모여든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들어 그 후예인 [[패서]] [[호족(한국사)|호족]]이 이 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우게 된다. [[재령군]]이 과거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로 불렸던 점이나 고구려 도시 유적이 나온 곳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유력한 설로 꼽히고 있다. 다만 현재의 [[서울특별시]] 부근 북한산성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가 평양, 혹은 남평양이라고도 부른 바 있다는 점과 신라가 이곳을 한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듯. 다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군사대치 관련한 유적이 서울보다 북쪽인 [[임진강]]선에서 많이 발견되고, 재령에서 도시 유적지가 나온 이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원래 서울 지역에 있어서 한성이었다가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탈환한 이후 이름만 현재의 재령으로 옮긴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794347&cid=46620&categoryId=46620|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