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성부 (문단 편집) === 조선 초의 한양 천도 === 그 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며 [[태조(조선)|태조]]는 고려 말의 천도 분위기(외적 방어, 풍수지리, 도참설 등)의 영향으로 강하게 천도를 추진한다. 이 당시 신료들은 대체로 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태조는 처음에는 고려 말에 가장 주목받았던 한양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천도를 명하였으나 이후 신하들의 반대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신료를 파견하여 길지를 조사시키고 두 차례 순행을 단행하는 정성을 보여 "천도는 무조건 할 것이되, 어디로 할지 정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신료들이 "꼭 해야한다면 한양이 가장 좋다"고 물러나면서 한양이 수도로 낙점되었다. 태조는 즉위한 뒤 한 달만에 한양 천도를 명하였으나[*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8013_002|태조 1년 8월 13일]],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8015_002|태조 1년 8월 15일]]]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이 아직 궁궐과 성곽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폐가 될 수 있으므로 천천히 하자고 하여 미뤄진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9003_001|태조 1년 9월 3일]]] 이듬해 1월 태실 증고사[* 胎室證考使, 왕실 자녀의 탯줄을 묻을 곳을 조사하는 임시 관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권중화(權仲和)가 (아마 수도 입지 조사를 겸해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鷄龍山) 일대에 대한 도읍 지도를 바쳤고[*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201002_001|태조 2년 1월 2일]]], 태조는 이달 19일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지세를 살피러 갔다. 당시 대신들은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태조는 이러한 태도를 이해한다면서도 천도에 대해서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202001_001|태조 2년 2월 1일]]] 결국 그 자리에서 계룡산이 새 도읍으로 낙점이 되었고, 행정 구역을 정하고 궁궐 건설까지 추진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0_001|태조 2년 2월 10일]]] 이 때, 태조가 왕사(王師) 자초(自超, 무학대사)에게 터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만 답하였다고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1_002|태조 2년 2월 11일]]] 이곳은 지금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이다. 신도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운 도읍'이라는 뜻이다. 이 때 경기도관찰사 [[하륜]]이 나서서 계룡산이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부지가 너무 좁고 근처에 큰 물이 없어 도읍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권중화, 정도전, 남재 등이 의견을 검토한 결과 하륜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계룡산 공사는 중지되었다. 이와 함께 태조는 다시금 도읍 부지를 물색할 것을 명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212011_001|태조 2년 12월 11일]]] 다음 수도 후보지는 무악(毋岳)이었다. 1394년 2월 태조는 조준과 권중화 등을 보내 무악 땅을 살펴보게 하였고[*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2018_002|태조 3년 2월 18일]]], 이들은 돌아와 땅이 좁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홀로 무악이 협소하기는 하나 개경의 강안전(康安殿), 평양의 장락궁(長樂宮)에 비교하면 넓은 편이고, 당시 유행하던 도참서나 풍수지리가 말하는 것과도 부합한다며 옹호하였다. 이외에도 서운관(書雲觀)의 윤신달(尹莘達)과 유한우(劉旱雨)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료들은 천도에 반대하였으나[*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6027_002|태조 3년 6월 27일]]], 결국 태조가 다시 직접 행차하여 살펴보기로 결심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2023_002|태조 3년 2월 23일]]] 태조는 8월 8일 무악에 친히 행차하였고, 서운관의 윤신달과 유한우 등이 다시금 반대의견을 말하자 빈정이 상하였는지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를 보아 태조는 도참설에 다소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서운관에서는 도참을 모른다고 하자 태조는 "그러면 지리법으로 말해보아라"라 하였는데, 유한우는 >고려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라며 역시 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태조는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 등의 발언으로 천도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강하게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서운관에서는 "'''우리 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개경)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 한양)이 다음입니다.'''"라고 의견을 내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1_001|태조 3년 8월 11일]]] 다음 날 태조는 재상들을 모아 도읍에 대한 의견을 올리라 하였는데, 각자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주요 논점은 볼드체) || 판삼사사[br]정도전(鄭道傳) ||(1) 무악은 나라 중앙에 위치하고 강이 가까워 조운이 통하지만, 골짜기에 있어서 좁다. (2) 유학자의 입장에서 도참, 지리와 같은 음양술수는 터무니없다. 중국의 여러 왕조의 예를 보건대, '''국가의 흥망성쇠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며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3) 삼한(삼국시대)의 옛 도읍은 모두 치우쳐 있어서 도읍할 곳이 없다. (4)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므로, 때를 보았다가 추진해도 늦지 않다. || 우회적 천도 반대[*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2_002|정도전]]] || || 문하 시랑찬성사[br]성석린(成石璘) ||(1) 무악이 좁으므로 도읍이 되기 어렵다.[br](2) 개경의 지세 또한 완벽하지 않아서 좌소(左蘇)와 우소(右蘇)를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설이 있었으나, 이들을 순행하되 개경을 본궐로 삼으면 된다.[br](3)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서 생겼고 뒷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br](4) 민력을 쉬게 하였다가 때를 보아 추진해도 늦지 않다. || 천도 반대[*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2_003|성석린]]] || || 정당 문학[br]정총(鄭摠) ||(1) 중국 역대 왕조가 그랬듯 도읍할 곳이 많지 않으며, 국내에서는 개경만한 땅이 없다.[br](2) 굳이 옮기더라도, 무악은 너무 좁아서 쓸 수 없다. || 천도 반대[*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2_004|정총]]] || || 첨서중추원사[br]하륜(河崙) ||(1) 무악이 좁다 하더라도 계림(경주)과 평양보다는 넓다.[br](2) 나라의 중앙에 있고, 조운이 통하며 술법가들이 말한 땅(도참설)과 얼추 형세가 맞다.[br] || 무악 찬성[*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2_005|하륜]]] || || 중추원 학사[br]이직(李稷) ||(1) 나라의 중앙에 있으며 산의 기맥이 모이고, 조운이 통하는 곳이 좋은 도읍지이다.[br](2) 국내 비결에서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한강에 임하라." "무산(毋山)이라." 한 것을 바탕으로 할 때 이 곳은 바로 무악이다.[br](3) 그러나 무악이 좁은 건 인정한다. || 중립 찬성[*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2_006|이직]]] || 이처럼, 무악은 지리적으로 볼 때 국토 중앙에 있으며 한강을 낀 것은 장점이지만 너무 좁다는 것이 지적되었으며, 외적으로는 민력을 지나치게 들인다는 점, 지리적으로 개경보다 좋은 땅이 없다는 점 등이 공통적으로 지적되었다. 태조는 이미 천도할 생각을 굳혔기 때문에 재상들의 이러한 반대 의견에 언짢음을 표했고, 그 다음 남경(지금의 사대문 안)으로 행차하였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 >"여기가 어떠냐?" > >윤신달이 대답하였다. >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 북서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 >"송경(개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3_001|태조 3년 8월 13일]]] 이외에 무학대사에게도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고[*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다른 재상들도 "꼭 옮기려면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만 줄곧 무악을 밀던 하륜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라며 다시 홀로 반대하였다. 결국, 돌고 돌아 결론은 한양이었다. 한양은 고려 말 가장 유력한 천도 후보지였으며, 태조 또한 즉위하자마자 한양 천도를 명한 바 있었다. 이 때 겨우 재상들의 (수동적) 찬성 하에 한양 천도가 일차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태조는 양원식(楊元植)이 제안한 광실원(廣實院) 동쪽의 계족산(雞足山), 민중리(閔中理)가 제안한 도라산(都羅山), 임진현 북쪽의 신경(新京) 등을 살펴보았으나 모두 후보지로 삼기 어려워 그만두었다. (8월 16일) 광실원 : 조운이 통하지 않음. (8월 18일) 도라산 :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태조 이렇게 긴 여정(8월 8일 ~ 8월 18일)을 끝낸 이후 개경에 돌아온 태조는 24일 도평의사사의 상소를 받는 형식으로 천도를 확정지었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는 박(亳)에, 주(周)나라는 풍호(豊鎬)에,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8024_002|태조 3년 8월 24일]]] 이후에도 태조는 11월 한차례 더 무악을 다시 알아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으나, 신하들이 좁다고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11025_001|태조 3년 11월 25일]]] 이 시기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상소(시기는 일치한다.)가 조선 초 문신 류관(柳寬, 1346~143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00년(정조 24년)에 간행한 하정유집(夏亭遺集)에 『태조조논무악정도소』(太祖朝論毋岳定都疏)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696|정보]][[http://moonhwaryu.co.kr/history/people/RyuGwan-003000.html?PHPSESSID=0761b1fbcc13f4cffbc1399ddbcd9ede|원문]] 여기까지는 실록에 나오는 정사이고, 한양 천도에 관해서는 무학대사와 관련한 유명한 야사가 있다. >태조는 [[무학대사]]를 보내 한양 땅을 살펴 보게 했는데, 본래 [[왕십리]]에 수도를 삼으려고 하다가 한 노인이 지나가면서 소에게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 라고 하는 것을 들은 무학대사가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으니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도읍으로 삼을 땅이 있을 것이오."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과연 도읍으로 삼을 만했고, 그곳이 지금의 [[경복궁]] 자리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한양은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한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를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군|고양현]]과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태종(조선)|태종]] 시절까지는 옛 개성부를 가리키던 말인 [[개경]]에서 따와 한경(漢京)이라고도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