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양 (문단 편집) == 방어 == 한양은 [[서울 한양도성]] 성벽을 갖추고 있기는 한데, 인구와 병력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고 지형도 평탄해서 막상 농성전에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았다. 한성 성벽에서 그나마 지형이 험한 곳은 북악북쪽의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 정도이다. 나머지는 남산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한 평지였다. 이런 이유를 들어 [[숙종(조선)|숙종]]은 [[북한산성]]을 포함해 경기도 일대에 산성을 여기저기 만들고 [[청나라]]에는 외적방어용이라고 강변한다. 실상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제외하곤 반란대비용이었을거란 견해도 있다. 도성사대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숭례문]] 문서 참조. 유교적 정치 관념을 반영시킨 도성이라는 의전적 의미가 강하며, 성곽은 한성부의 행정적 경계에 해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저십리]]라고, 한양 성곽 바깥 10리 지역까지는 한성부의 관할지역이었다. 성저십리는 민락, 벌목, 매장 등이 금지된 도시(농업)산업배후지역이고, 한양성 안이 거주 및 생활지역이다. 물론 후기에는 인구가 늘고, 제한이 느슨해지면서 민락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양의 외성, 즉 서울 성곽은 [[로마 제국]]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방어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 로마제국도 후기에 건설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순수한 의미의 '방어'용이었다. 이때는 로마 시 외곽 전체를 시벽(市壁)처럼 둘러싸는 형태였다. [[서울 한양도성]] 항목에서 나왔듯이 성곽의 규모도 거대한데다가 1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를 끼고 농성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서울 성곽을 사이로 공성전이 벌어진 적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었다. [[이괄의 난]]에서도 시가전이 아닌 무악재의 야전이 벌어졌는데 서울 성곽이 방어수단으로서 제 구실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앞의 [[이괄의 난]]. 무악재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이괄군이 급히 도성으로 철수하려 하자 도성의 백성들이 서대문을 잠가버리고 못 들어오게 막았다. 사실 이괄도 남대문을 통해서 다시 입성하기는 했다. 하지만 방어능력 제로인 성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하릴없이 남대문까지 우회하고, 게다가 관군이 추격해왔기에 보복조치조차 못한 채 털레털레 도망간데서 이괄군의 비참함을 잘 알 수 있다. 한양성벽이 표시된 관광지도 [[http://www.hanyang.ac.kr/top_news/2013/084/cover_img22.jpg|▶]] 한양도성의 방어적 가치에 관해 매번 온라인에서 [[병림픽]]이 벌어지곤 하는 것은 성벽용도의 이중 기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소모적 논쟁에 가깝다. 한양도성은 국가간 [[전면전]] 상황에서 한양 인접지역까지 점령해오며 공성전을 시도하는 적군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 부적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burgh에 해당)의 가치는 전면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시의 치안관리 및 정변 사태에서 거부(Denial)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포함된다. 평시에는 성문을 출입인원을 제한하며 야간에는 출입을 제한해 치안유지 역할을 할 수 있고,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정규군은 아니지만 내란, 정변 혹은 반란 상황에서 도성 성벽의 존재는 지도부가 순식간에 휩쓸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당장 위에서도 이괄군의 기세가 꺾이도록 하는 기점을 수행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판단할 때에는 그 효과뿐 아니라 효율 관점에서도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큰 효과가 있어도 효율이 너무 나쁘면 대체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 정치적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정치적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성(castle)이 있던 유럽 중세, 근세와 다르게 조선은 전국에 행정력이 미치는 중앙집권국가이였다. 때문에 평지 수도 역할을 하는 곳에 도성 앞까지 당도한 적의 정규군을 상대할 성의 건축은 비효율적이며 동시에 그 효과도 낮다.대신 평시에 행정과 치안관리 역할을 담당할 성을 건축하고 방위군을 운용하는 것이 충분히 타당한 방어전략일 수 있었다. 한양도성은 성 주변에 높은 산이 여럿 둘러싸고 있어 감제고지가 너무 많은 등 입지상의 문제가 여럿 있었기에 이에 유사시 남한산성 등의 요새로 이동하는 방어체계를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이 특이케이스 인 건 아니다. 평시용 평지성-전시용 산성이 짝을 이루는 도성체계는 한반도 도성체계의 특징이라 할 만큼 역대 한반도 왕조에서 자주 이용되던 방식이다. 각각 졸본,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가 그랬고 사비성 천도 이전의 백제도 이런 체계를 이용했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에도 한동안 안학궁-대성산성의 이중 도성체계를 유지하다가 일원화된 도성인 평양성을 새로 축성했고, 백제도 [[부여 나성]]을 쌓으면서 부소산성 등 농성용 산성을 따로 쌓았다. 다만 이전 시대로 달랐던 점은 부소산성 또한 나성 성곽과 이어져서 일부를 이루었다는 것이고. 다만 조선의 이러한 수도방위체계의 특성과 한계를 당대 조선 정부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서, 조선 후기에 들어 좀 더 효율적인 방어대책으로 [[한양도성]] - [[탕춘대성]] - [[북한산성]]에 이르는 새로운 방어체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체계의 유기적 연결고리인 탕춘대성의 동쪽 부분이 예산 문제로 아예 착공조차하지 못하면서 반쪽짜리가 되어버린게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현재는 《[[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 등재릉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