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양 (문단 편집) == 여담 ==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이다… 내가 지금은 죄인이 되어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 반드시 한양의 십 리 안에서 지내게 하겠다…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 >[[정약용]], 〈[[하피첩]]〉 중 [[조선]] 개국 이후 [[정종(조선)|정종]]이 [[왕자의 난]] 때 혈육들과 공신들의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는 이유로 [[개성시|개경]]으로 잠시 환도했었는데, [[태종(조선)|태종]] 집권 이후 태종이 한양으로 환도하려 했지만 개경과 무악(신촌)신도시를 주장하던 신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전기의 관료층은 거의 대부분 구 고려의 관료층이다. 자신들의 기반인 개성을 버리고 신도시로 옮겨가는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 게다가 천문과 풍수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도 거의 만장일치로(!) 개경을 밀었다. 위의 이유도 있을 뿐더러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도 아닌 도선 대사가 점지해준 길지인 개경을 두고 풍수지리 따위 쌩까고 만든 도시인 한양으로 천거하는 게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양이 수도가 되면, 자신들의 입지도 조금씩 줄어들 게 뻔하다. 무악을 민 것은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하륜]]. [[하륜]]은 무악 신도시의 열성 지지파였다. 이유는 이미 이전에도 주장한 적이 있어서 관철시켜야 자기 입지가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정작 태종조차도 무악에는 반대했다. 앞서 서술했듯 태종은 한양으로 옮기려 했기 때문. 하지만 강력한 왕권 정치를 지향한데다가 엄연히 유학자인 태종은 당연히 못마땅했다. 실록을 보면 개성을 뜨고 싶어하는 태종과 부소명당(송악)이 최고라는 서운관 관리들 사이의 입씨름이 지겨울 지경. 결국 태종은 "내가 [[종묘]]에 들어가서 '''[[동전 던지기|엽전을]] 던져 볼 테니''' 그 결정에 따르라"라는 말과 함께 사촌 형님 완산부원군 [[이천우]]를 시켜 [[엽전]]을 던져 점을 치게 한다. 결과는 길(吉) 2 대 흉(凶) 1로 결과가 나와서 한양으로 환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인 실화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410006_001| 태종 8권, 4년(1404 갑신/명 영락(永樂) 2년) 10월 6일(갑술) 1번째기사.]] 한성부 관아는 중부, 서부, 남부, 동부별로 건물이 따로 분포했었다. 마치 서울지역 [[검찰청]]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서울북부지방검찰청]] 이런 식으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 한성부 중부 관아는 지금의 [[KT]]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지사+[[주한미국대사관]]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서부관아, 동부관아, 남부관아 역시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역사적 지명이 되었지만,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방 소도시나 시골 노인들은 '서울'을 '한양/한성'이라 일컫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청(漢城/한청)'은 한 때 서울의 중국어 명칭이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서우얼(首爾)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수도로서 한성의 역사가 500년 남짓인데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은 무려 1500명이었다고 한다. 1년에 3명씩 교체가 된 것. [[주진형]][* 전 [[열린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현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 前 한화증권 사장은 고위직을 짦은 임기로 돌려먹는 한국사회의 구태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실 한성판윤뿐만 아니라 삼도수군통제사 같은 건 3일만에 바뀌기도 한다. 이것도 다 경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