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영애 (문단 편집) == 생애 및 가수 활동 == [[신촌]] 일대에서 그냥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1976년 [[해바라기(가수)|해바라기]]의 리더 김의철의 발탁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한영애 자신은 1986년 데뷔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솔로 앨범 1집을 발매한 게 이때이기 때문. 여하튼 한영애는 해바라기 1, 2집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사실 이거보다 전에 백호빈 오종국 한영애 3명이 같이 앨범을 낸 게 나왔었다.] [[파일:한영애비공식솔로대뷔앨범.jpg]] 이와 비슷한 시기에 솔로 앨범을 준비해 내놓으려고 했지만 발매 직전에 음반사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엎어버렸다. 더 어처구니 없는 건 다른 음반사가 그녀에게 말 한마디 없이 '''무단으로 그녀의 음반을 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나마 이 음반도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며 실패했다. 그녀는 일련의 사태로 가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친구의 대학 졸업 작품을 보러 갔고 그 뒷풀이 현장에서 연극 배우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한영애는 주저없이 배우로 방향을 틀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출신이기도 하니. 6년에 걸쳐 연극 배우로 활동한 후 3년 정도 공백기를 가진 한영애는 자신의 길은 가수라고 생각해 다시 가수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이후 한영애는 여러 방송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노래를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여러 번 밝혔다. '노래는 말하듯 하고, 대사는 노래하듯 하라'는 가르침을 얻기도 하고, 음악의 공간성을 체득하게 되었다고.] 1986년 1집 "여울목"을 냈으며 이 음반은 큰 호응을 얻었다. 동시에 1986년부터 [[신촌블루스]] 활동을 하는데 신촌블루스 1집 "신촌Blues"에서 소울풀한 창법을 보여줘 큰 반향을 얻었다. 이어서 1988년 자신의 2집 앨범인 "[[바라본다]]" 를 냈는데 이 음반은 한영애의 대표곡들이 수록된 명반이 되었다. 1992년 3집 "한영애 1992"에는 한영애의 또 다른 명곡인 "조율"이 수록되어있는 걸로 유명하다. 이듬해인 1993년 63빌딩에서 "아.우.성" 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고 이 콘서트 실황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이후에는 개인 콘서트나 연극 배우 활동을 하면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2012년 5월에는 [[보이스코리아]] 시즌1에 출연하여 Super Voice4와 본인의 노래 누구없소, 조율을 부르기도 하였다.[[https://youtu.be/CWuhhSVhZM8|#]] 2014년 11월 26일, 오랜만에 새 앨범 <샤키포>가 발매되었는데 그에 앞서 절판되었던 "아우성" 음반과 4집 "불어오라 바람아"가 8월에 재발매되었다. 2016년 12월 3일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박근혜 퇴진 국민 비상 행동 6차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갈증', '내 나라 내 겨레', '홀로 아리랑', '조율'을 열창하며 "여러분 지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에는 서초동 검찰 개혁 집회, 노무현 대통령 추모 공연 등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7년간 EBS 라디오 프로그램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를 진행했다. 2017년 10월 23일부터 국악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한영애의 문화시대"를 진행한다고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https://www.facebook.com/namumusic010.2205.9670/posts/1603899412965699|#]] 2019년 10월 26일, 제11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여 공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