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옥/장단점 (문단 편집) === 크기 === 고려시대 이후로 거목들의 고갈로 인해 큰 목재가 부족해지어 다른 나라들의 건축물들에 비해 그 크기들이 작은 탓에 시선을 끄는 압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일부 있다.[* 그 이전 시대에는 거목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ㆍ[[황룡사]]ㆍ[[흥왕사]]ㆍ[[안학궁]] 등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는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물의 단일 크기는 거목 고갈로 계속 작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총 건축면적(建築面積)[* 건축물의 수평투영면적 1층의 바닥면적이 해당됨] 자체는 훨씬 더 커졌는데 [[경복궁]]의 전체 건축면적[* 훼손이전 기준 약 16만 제곱미터 (출처: 예(禮)로 지은 경복궁, 임석재)]은 [[고구려]]의 [[안학궁]]보다 더 크며 [[신라]]의 궁궐인 [[경주 월성]] 보다도 훨씬 더 넓고 [[일본]]의 [[교토고쇼]][* 총건평 8482평으로 약 2만8천 제곱미터] 보다는 약 5.7배 그리고 천황궁인 메이지 궁전(明治宮殿)[* 총건평 5800평으로 약 1만9천 제곱미터] 보다는 약 8.4배 이후 새로 만들어진 [[고쿄]][* 약 15,643 제곱미터] 보다는 약 10.2배 이상 더 큰 총 건축면적을 자랑한다. [[파일:attachment/forbidden_and_gyeongbok.jpg]] 심지어 자금성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느껴질 정도이다.[* 다만 실 면적에서는 꽤 차이가 있는 게 사진으로 보아도 자금성은 부지(네모) 안에 빼곡히 건물이 들어선 반면 경복궁은 비어있는 녹지가 꽤 많아보인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복궁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 당하면서 소실된 건물터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것으로''' 실제 경복궁은 건축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궁궐이었다. [[https://i.imgur.com/gPOGWb3.jpg|고종 당시 경복궁의 모습]] 즉, 현재의 경복궁은 경복궁 내의 전각에서 겨우 125동만 복원되어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겨우 25% 수준만 복원된 상황'''이다. 자세한 사항은 [[경복궁/역사]] 문서를 참고.] 아예 목재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수원화성]] 또한 그 크기를 보면 굉장히 웅장한 편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쪽이 더 많으므로 최상류층[* 벌열가문이라 불리던 관직을 독점한 가문들. 북촌에 있던 이들의 저택은 지금 다 사라지고 작은 필지로 나뉘어 근대형 한옥이 들어섰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윤보선]] 가옥, 안채 건물 한 쪼가리만 남았음에도 크기가 주변 근대한옥들을 압도하고 중국이나 일본급으로 크고 사치스럽다. 왕족의 잠저였던 [[운현궁]] 역시 마찬가지. 운현궁의 사랑채와 대문은 당대 일본인들에게도 찬사를 들었다.]의 가옥이나, 왕궁, 사찰은 그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졌다. 당장 [[임진왜란]] 직후만 해도 미륵전, 팔상전, 각황전 등 '''양반과 왕실'''의 지원으로 대규모의 불교 건축물들을 지은 바가 있다. 물론 목재 부족으로 작은 나무를 짜맞추거나 울퉁불퉁한 나무를 그대로 쓴 흔적이 보인다. 참고로 거목 고갈로 인한 건축물의 크기 축소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사례만 봐도 [[당나라]] 시절 [[대명궁]]이 수백년 뒤인 [[명나라]] 시절 [[자금성]]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기후와 나무 품종상 한반도에 비해 목재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지만 한반도의 겨우 소나무 자체가 빨리 자라는 품종이 아니고 이미 고려시대때 부터 삼림자원 고갈로 거목들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단일 건축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단일 건축면적이 고려시대 이후로 작아졌다는것도 '''오해'''로 실제로 현재는 사라진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을 보면 '''단일 건축면적이 결코 작은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최소 수십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으며 [[http://luckcrow.egloos.com/2586612|서총대 1]] [[ http://luckcrow.egloos.com/2592554|서총대 2]]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 또한 굉장히 큰 크기를 자랑했다. [[http://luckcrow.egloos.com/2342317|흥천사 사리각 1]] [[http://luckcrow.egloos.com/2461500|흥천사 사리각 2]] 이에 반박하는 측에서는 가령 일본에는 교토에만 히가시혼간지, 니시혼간지, 지온인, 렌게오인 등 [[경회루]][* 중건된 경회루의 규모는 당시 조선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규모로 생각되어진다.]보다 규모가 큰 전각을 여럿 지닌 절이 있으며 나라의 도다이지는 말할 것도 없고 히메지 성이나 맨날 작다는 소리를 듣는 [[교토고쇼]] 조차 정전인 자신전(紫宸殿)의 크기는 [[근정전]]이 아니라 경회루에도 크게 꿀리지 않는 수준이며 니조 성 니노마루어전을 이루는 6동의 전각 중 몇 개는 또 경회루와 그 크기가 비슷한 정도이다라는 의견을 제기한다. 그외 조선의 왕립사찰인 [[회암사]]의 경우도 대웅전 격인 보광전의 크기는 조계사 대웅전이랑 비슷한 정도이고 대표적인 거찰로 일컬어지는 [[황룡사]]의 금당이나 [[미륵사]]의 강당 또한 단일전각으로서 규모는 교토의 절들에 미치지 못하며 [[종묘]]의 정전 또한 렌게오인 산주산겐도보다 길이가 짧고 너비가 좁아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은 산주산겐도로 알려져 있고 없어진 건물들을 따져보아도, 한국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안학궁]] 중궁과 발해 [[상경성]] 2궁전도 건축물의 넓이는 히가시혼간지 고에이도보다 작으며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전소된 [[도다이지]] 다이부쓰덴은 정면 85.8m에 측면 50.3m로[* 이후 재건된 다이부쓰덴의 크기는 정면이 57.5m, 측면이 50.5m이다.] 두 왕궁보다 넓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남은 터를 이용해 정확히 측정을 해봤을 때, [[안학궁]]의 중궁 1호 궁전은 정면 길이는 87m에 측면 길이는 27m였으며 이는 [[당나라]](唐)대의 황궁인 [[대명궁]]의 정전 함원전(含元殿)의 정면과 측면 길이가 각각 75.9m와 41.3m인 것과 전소된 고대 도다이지 다이부쓰덴의 정면 85.8m, 측면 50.3m에도 결코 크게 뒤지지 않는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나라현]]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도다이지 건축에 [[신라]] 출신 목수가 총감독을, 거대불상은 [[백제]] 출신이 디자인했다고 하며, 사자 석상의 경우 송나라 출신이 작업했다고 하므로 '''이러한 거대건축물들을 건축 할 수 있는 능력이 동시대 한반도에도 분명 존재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위에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보다 더 크거나 비슷하다고 설명된 [[교토고쇼]] 조차 정전인 자신전(紫宸殿)의 크기는 정면 33m 측면 23m로 [[경복궁]] [[근정전]]의 크기가 정면 30m에 측면 21m 그리고 [[경회루]]가 정면 34.4m에 측면 28.5m인것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규모상에서 큰 차이는 보이지 않으며 이렇게 객관적인 크기 비교를 하였을 경우 오히려 한국 건축물들만 유독 규모가 작았다라는 근거는 역으로 희박해진다. 또한 [[서총대]]의 경우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확실히 말할 수가 없지만 《[[연산군일기]]》의 "1천 명은 족히 앉을 만하다"와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란 기록만 보더라도 그 크기가 굉장히 컸다는 걸 분명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실록]]》의 기사에는 이런 구절마저 나온다. >창경궁(昌慶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그 위에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中 서총대를 제외한 조선시대 건물들의 경우 웬만큼 큰 객사 건물도 결국 근정전의 규모를 넘어서는 일은 거의 없었고, 절의 경우 쇠퇴하거나 향교로 개조되는 통에 산으로 들어가며 규모가 작아졌기에 서총대가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전세계 모든 거대 건축물들은 해당 문화권내에서도 특이하게 큰 규모에 속하는 건축물들이다. 즉, 그런식의 기준을 적용하면 다른 문화권의 거대 건축물들도 모두 평범한 경우들이 아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대 한국 건축물들은 단일 건축면적에서도 특별히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며 당연하지만 조선시대 건축물들의 경우에도 실제 수치상 단일 건축면적에서 특별히 규모가 작지않았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동서양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 건축의 수요는 필요가 없어지니 점차 줄어든 경향이었다. 중, 근세에 피라미드 같은 건물을 짓지 못했다고 중, 근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퇴보한 시대인게 아니며,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이 통일신라의 왕릉보다 더 크다고 해서 삼국시대 신라가 더 찬란하고 위대한 시대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특히 왕궁, 종교, 선전용 건축을 제외하면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커다란 건축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