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옥/장단점 (문단 편집) === 기술과 화려함 === 왕실 건축 이외의 양반 가옥이나 절, 관청 등등의 건축물들을 보면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들 보다 구조적, 장식적으로 단조롭고 규모도 작은 경우가 많다라는 의견도 일부 있다. 사실 한옥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마루식 구조와 온돌식 구조가 합쳐지고, 유교적 사상이 심화되고, 건축 기술, 민간 경제가 더 더욱 발전됨[* 막상 상업이 발전했다는 식으로 일컫는 고려나 신라보다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더욱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나타났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에 따라 보다 복잡한 구조의 집들이 지어지는 방식으로 계속 건축 기술들이 꾸준히 발전하게 된다. 특히나 조선시대의 건축 기술의 발전은 [[수원 화성]] 같은 당대 동양 기준으로도 고난이도의 거대 건축물 또한 건축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의 전근대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에 가장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과는 별개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화려함이 의도적으로 많이 소거된것 또한 사실이기는 하다. 이는 같은 조선시대 건축이라도 [[해인사]] 대적광전 같은 [[불교]] 건축은 그나마 이런 기조에서 자유롭게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강조하는 '금단청'을 칠했지만, 유교 사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조선의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들은 오히려 금단청에 비해 화려함과 복잡함이 덜한 모로단청을 의도적으로 택했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정작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나 [[서원]]은 용도 자체가 유교적 건축물의 대표격으로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YYWb&articleno=551&categoryId=3®dt=20111110181327#ajax_history_home|종묘 단청]] 결론적으로 단지 사치를 금하는 이런 유교적인 풍조탓에 미적인 측면 즉, 화려함이 많이 줄어든 모습이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을 뿐 실제 건축 '기술' 그 자체는 조선시대의 건축이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더 다양하며, 기술적으로도 더 발전되고 더 정교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일자형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 또한 조선시대였으며 당연하지만 민간의 가옥 또한 조선시대에 더 복잡한 형태와 발달한 기술 그리고 좀 더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GmounBtemple.jpg]] 대표적으로 [[보덕암]]의 경우 아예 구리 기둥으로 기둥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도를 높이는 것도 있겠지만, 우선 기둥이 너무 길기 때문에 비를 맞아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그 이전 시대에는 이렇게 구리 기둥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용한 예가 없었다.[* 구리로 감싼 기둥을 중종 6년(1511)에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그 이전의 건물은 나무기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mahan.wonkwang.ac.kr/b03.jpg]] 사실 이 화려함 또한 조선시대에 무조건 억압을 당한것도 아니었는데 전기 경복궁의 경우 경복궁 내의 상당수의 건축물들이 청자로 만든 기와에 용무늬가 새겨진 석조 기둥들로 건축되었으며 후기에도 강화행궁과 [[외규장각]] 전도에 묘사된 용미는 심지어 [[금]]칠까지 되어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무조건 배격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