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옥/장단점 (문단 편집) ==== 벽돌의 사용 ==== 알고 보면 의외로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벽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수원화성]] 이전에 전축성 건설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벽돌 사용이 많았던 삼국시대에도 벽돌의 사용은 국영 사찰의 장식 벽돌이거나, 일부 성곽과 백제의 남조식 무덤 등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되고 관리되는 건물들이었다. 사용 빈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현격하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벽돌 사용이 중국처럼 많지 못했던 이유는 (1) 조선의 토질상 중국 화북 지역만큼 낮은 온도에도 벽돌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3&cp_code=cp0210&index_id=cp02100624&content_id=cp021006240001&print=Y|#]] 조선 후기 중국식의 벽돌 제작 전용 원추형 가마 도입 전까지 좋은 벽돌 만들기가 힘들었고 (2) 대륙성 기후인 중국 화북 지역보다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에 잘 붙지 않았고 [* 김왕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참조.][* 동아시아에서 벽돌 사용의 본좌인 중국 건축에서도 전축 건축은 대륙성 기후면서 좋은 흙을 구하기 쉬운 화북지역에 특히 집중되며, 습기가 많은 남부로 갈수록 전통 건축에서 벽돌 사용은 감소하고 흙벽이나 목조 건축이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기후 탓만 하기 어려운게 한반도보다 더 습하면 습하지 결코 건조하지 않은 중국 [[푸젠성]], [[광둥성]], [[타이완 섬]]에서는 벽돌이 다양한 건축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Architecture_of_Taiwan|참고1]] [[https://en.wikipedia.org/wiki/Lingnan_architecture|참고2]]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아래에 나오는 상공업의 부진이다.] (3) 벽돌과 관련된 상공업 발전이 부진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 사치품 중 하나인 비단의 경우, 그 자체가 일종의 대체 화폐 역할도 하였을 뿐 아니라 수요가 일정했기 때문에 공급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어 원활한 수요-공급이 이루어졌지만, 벽돌의 경우 건축자재였고, 또한 비교적 높은 단가를 가진 고급 자재였기 때문에 고급 건물의 신축이 일정하게 발생하는 수요가 없이는 벽돌의 공급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조선시대에서 건물은 왕실의 감시와 더불어 검약함을 강조하는 조선의 사상적 제약 때문에 발달이 늦었다.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중인계층이 성장하는 조선 후기 조차도 건축 분야에는 비교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들어 중국 건축의 영향과 국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벽돌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담장이나 기단을 만들 때나 종묘처럼 조선 후기에 등장한 화방 벽을 만들 때 종종 사용되는 정도였지만 이조차도 민간에서는 일정 크기의 자연석들을 수집해 적당히 가공한 후 빈틈을 흙으로 마감하는 수준이었고, 왕실 건축에서나 제한적으로 벽돌을 구워 시공하는 특수제작의 성격을 뗬기에 때문에 벽돌이 사용되었다는 정도의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완전히 대중화된 것은 관련 기술과 자본이 들어온 개화기~일제 강점기부터였다. 그리고 또 거기서 50년쯤 지나서 고속성장기가 되면 벽돌 양식(조적조)은 외부 마감을 제외하면 무참히 버려지고 [[철근 콘크리트]]가 보급된다. ~~ 역시 우리나라는 벽돌과는 인연이 없는 나라였던 걸 수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