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용덕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325162117408.jpg]] || [[파일:한용덕 투구폼.gif]] || || 선수생활 막바지의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 투구폼 || 7월 콜업된 한용덕은 스윙맨으로 전천후 활약하며 감독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는다. 2년차에도 스윙맨으로 뛰었으나 선발로 점차 고정되는 모양새였고, 90년부터는 선발 로테이션에 고정되었다. 처음엔 구종이 패스트볼 밖에 없는 등 투수로서도 그저 그랬으나[* 그저 그랬다기엔 적지 않은 이닝을 던지면서도 3점대 초중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구위 하나는 끝내주던 선수.], 1990년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로 슬라이더를 장착하며 화려하게 변신하여 그 해 13승[* 8선발승으로 [[한희민]]과 팀내 최다 선발승]을 기록하는가 하면 1991년에는 17승[* 16선발승으로 그 해 최다 선발승을 기록했고 해태 [[선동열]]과 롯데 [[윤학길]]이 15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2위]을 거두며 [[한일 슈퍼게임]] 대표 선수로 선발, 4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1991년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보면, 그 당시 최강 팀인 [[해태 타이거즈]]는 빙그레와 상대하며 8승 3무 7패로 아주 근소한 우위이기는 했지만 단일 팀에게 3무를 기록할 정도로 피튀기는 접전을 많이 벌였으며, 결국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서로 상대 팀으로 만나 명승부를 펼쳤다. 그 당시 [[선동열]]이 투구수 10회 미만으로 한 이닝을 끝내면, 그 대항마인 한용덕 역시 10회 미만으로 끝냈다. 결코 [[선동열]]에 밀리지 않았던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1993년에는 완투 1위를 달성할 정도로 분투했지만 팀은 부상자 속출로 인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연속진출 기록은 5년으로 끝나게 된다. 1994년에 [[해태 타이거즈|해태]]의 '팔색조' [[조계현]]과 다승 경쟁을 벌이며 16승을 올렸으나 [[강병철]] 당시 감독과의 불화, 대형 교통사고로 인해[*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해 일어난 사고였다. 이 사고로 한용덕 자신도 크게 다쳤고, 아들도 크게 다쳤으며, 아내는 다리 절단까지 고려할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회복했다.] 시즌 아웃되었다. 다행히도 1995년 무사히 복귀해 3점대 ERA와 규정이닝을 넘기며 자신이 여전히 한화의 주축임을 강조했으나, 승운이 안 따라주며 8승 13패를 기록한다. 승패만 제외하면 평균자책점은 전년도와 비슷했고, 이닝이나 FIP는 전년도보다 확실히 나았음에도 저 오버패 때문에 기량 하락의 우려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당시엔 투승타타라는 말대로 승리가 에이스의 척도로 평가되던 시절이고, FIP 같은 건 도입되기도 한참 전이다. 팀의 에이스 [[정민철]]은 딱 이 시기에 리그를 호령했는데 오버패 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골든글러브 하나 못 받았다.] 그런데 1996년 ERA가 4점대로 상승하며 기량 하락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6년 연속 규정이닝을 돌파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던진 데다 전년도 큰 부상에서 갓 돌아오고도 관리 없이 180이닝을 소화한 후유증.[* 투수 혹사로 이름을 날린 강병철 감독은 한화에서도 구대성, 정민철 등 여러 혹사 사례를 남겼고, 한용덕도 그중 한 명이다.] 그래도 111.1이닝에 8승 8패로 3~4선발 정도의 성적을 찍으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는데, 1997년은 기록상 보여지듯이 승운이 정말정말로 없었다. 25경기 중 11번을 선발로 나와서 평자책 4점대에 93이닝밖에 못 채운 건 그렇다 쳐도, 1승 8패. 그리고 1998년 한용덕은 계투로 뛰면서, 평균자책점 2.26으로 부문 3위를 찍으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8월까지만 해도 1점대를 기록하며 당해 ERA 부문 1, 2위였던 [[정명원]], [[임창용]]과 함께 나란히 타이틀 경쟁을 했었고, 9월 초에는 승률 부문도 1등에 올라있었으나 막판에 추월당하고 만다.] 계투로 131.2이닝을 기록하며 규정이닝을 넘기는 가운데 선발등판 횟수는 단 2회였고, 56경기는 리그 9위[* [[차명석]]과 공동 기록]이자 [[구대성]]에 이은 팀내 2위였다. 게다가 당시 한용덕은 34세의 노장이었다. 아마 홀드가 좀 더 일찍 도입되었다면 1998년 홀드왕은 한용덕이 확실했을 만큼, 당시 한용덕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98년 한용덕보다 많은 경기에 나온 투수들 중 한용덕보다 확실히 나은 성적을 찍은 [[임창용]], [[진필중]]의 경우 마무리 투수였고, 경기수 공동 9위를 기록한 [[차명석]]은 77.1이닝에 ERA가 4점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무리해서였는지 다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미들맨으로 활약하며 부활하는 모습을 보인 한용덕은 다음 시즌인 1999년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들었으나 90.1이닝 동안 2승 7패에 ERA 7.47로 데뷔 후 가장 부진한 성적을 냈다. 때문에 그해 팀의 우승에 별 기여를 못했다.[* 이 당시 에피소드로 1999년 6월 3일 롯데전에서 [[박정태]]에게 연속안타 타이기록을 허용했는데, 다음 날 박정태가 또 안타를 쳐서 신기록을 수립하자 주장(투수조장) 자격으로 축하 꽃다발을 전달해야 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0년에도 선발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김원형]]과 함께 리그 최다패(15패)를 기록하며 한화의 급추락에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해 8월 23일에 100승을 달성하는 경사가 있었다. 2001년 37세로 다시 부활하며 노장의 투혼을 보여주었으나[* 다만 이 시즌에 삼성을 상대로 '''4연타석 홈런'''을 얻어맞았다.],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지 2002년부터 다시 하락세를 탔으며 2003년부터는 아예 불펜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2004년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후 은퇴를 결정하여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기록은 '''472경기 출장, 2,079⅓이닝 평균자책점 3.52 120승 118패 24세이브 1,341탈삼진'''이다. 통산 다승 19위, 통산 탈삼진 7위, 통산 이닝 7위로 충분히 명투수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지만, 같은 팀의 스타 투수 [[송진우(야구)|송진우]], [[정민철]], [[구대성]]에 비하면 주목을 덜 받는 편이다. 야구가 다시 부흥하던 2008년 당시에 이 세 명은 여전히 선수였고 살아 있는 전설로서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과거 전성기 모습이 회자되었지만 한용덕은 은퇴한 상태여서 주목들 덜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에 띌 만한 수상, 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도 있었다. 송진우와 구대성에 비하여 개인 수상 기록이 적은 정민철도 평균자책점 1위를 2번이나 했는데, 한용덕은 그런 타이틀이 없다. 1993년 완투 1위, 1991년 완봉 1위가 전부인데 이런 기록은 타이틀로 수상해주지 않는다. 1994년 다승왕 경쟁 도중 당한 교통사고가 그저 아쉬울 뿐이다. 통산 승리에 비해 패배가 대체로 많은 편이라는 것도 당시엔 감점 요인이었다. 시대가 흐르며 점점 다승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으나 당시에는 다승이 다른 기록보다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한화가 성적과는 별개로 높은 인기를 가지는 팀이지만 당시에는 비인기 팀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한 투수일 뿐 KBO 리그가 출범한 이래 32명뿐인 100승 투수에 9명뿐인 2,000이닝 투수로서 한용덕은 한화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사에도 이름을 남길 만한 명투수다. 참고로 현역 당시의 등번호는 40번이었는데, 이 번호를 선택한 이유는 은퇴할 때까지 40승 정도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서 고른 번호라고 한다. 그런데 은퇴할 때까지 거둔 승수는 40의 3배. 또 다른 설로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에서는 40살까지 야구하고 싶다고 해서 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건 은퇴 년도인 2004년이 [[대한민국]] 나이로 딱 40세가 되던 나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