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혼혈 (문단 편집) == 역사 == 원삼국 시대-야요이 시대 당시에도 인구교류가 있어 왔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으로 간 사람이 상당했고, 반대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온 이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백제]]와 [[야마토]] 간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교류가 잦았고, 그 덕택에 백제가 멸망한 뒤에 일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일본 민족에 흡수, 동화되었다. 고대에는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대규모로 이주하였지만 [[헤이안 시대]][* 동시대의 한반도는 남북국 시대]에 [[신라]] 출신 해적들인 [[신라구]]가 일본에 자주 출현하여 큐슈일대는 물론 세토내해에서도 대규모 약탈을 벌인 이후 점차 한반도 사람들의 일본 이주가 금지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는 주로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서부에 도래인들이 모여살았으나 일본 정부는 신라구와 내통할 것을 우려해 도래인들을 일본 동부로 강제이주시켰고[* 이들 중 일부는 [[에조|에미시]]와 접촉하여 에미시에 동화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이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되었다. [[오우치]]씨나 [[하타]]씨, [[코마]]씨 등 도래인의 후손이란 정체성을 유지한 경우도 현대까지 일부 남아 있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日本)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高麗)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http://db.history.go.kr/id/cnkb_060_0800_0010|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을 [[노예]]로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는데 이들과의 사이에서도 한일혼혈들이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874|#]]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10021_003|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10017_004|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7101_002|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인을 끌어들여 말썽을 일으키다]] [[임진왜란]] 때 [[항왜]]들은 거의 전부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은 한일혼혈이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전부 동화되어 결국 [[한민족]]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 이민 온 [[일본인]]과 현지 [[조선인]] 간의 결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내선 동화를 위해 합방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을 합법화 했는데 의외로 조선남-일본녀 조합이 일본남-조선녀 조합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아서 [[조선총독부]]가 당황했다고 한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36913&_dcbest=1&search_pos=-44338&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page=1|#1]],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62486&_dcbest=1&search_pos=-64338&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page=1|#2]] 보통 지배국의 남성이 피지배국의 여성을 취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일반적이었고 일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 일본이든 한국이든 가부장적인 시대배경상 일본인 여성이 조선인과 결혼하려고 조선으로 시집오는 일이 많았다는 뜻인데 이는 조선총독부측의 통계 자료에도 남아 있으며 왜 이런 역전현상이 나타났는지에 대해선 현재로서도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조선인 남성이 식민지배를 받고 있다는 자격지심을 일본의 여자를 지배해서 풀고자 하는 목적으로 일본인 남자로 위장해 일본인 여성을 꼬시고(..) 일본인 여성은 그것에 속아넘어가 결혼했다는 식의 추측이 있으나 개인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엄연히 거시적인 통계현상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1945년 [[8.15 광복]] 당시에는 부계혈통의식이 강해 아버지가 조선인인 혼혈아만 [[대한민국]]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본인인 아이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한국 국적 부여 대상이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 남겨진 한국인 어머니의 국적을 따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그 자손들이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대로 한국인 아버지가 광복 이후 일본인 어머니를 버리는 일들도 종종 있어 버려진 일본인들끼리 모여사는 곳이 한국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한일관계가 단절되면서 이미 결혼한 가정이 2세를 가지는 경우와 한국 내에서 극소수 잔류 일본인([[8.15 광복]] 당시 미혼이었음) 그리고 [[일본]] 내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새로 한일 혼혈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과 일본 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한일 혼혈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영남 지방에는 [[통일교]]의 영향이나 일본 취직으로 인해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결혼하여 다문화 다자녀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통일교의 경우는 [[가평군]] 설악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 실제로 경상도는 제주도[* 일제강점기에 이미 20만 명 이상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1920년대부터 이미 제주~오사카를 운항하는 '군대환'등의 정기 여객선이 있었다. 이들 중 최소 10만 명 이상이 해방 직후 제주도로 귀향했는데 전쟁 직후인데다가 척박한 제주도에 갑자기 1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유입되자 그로 인해 당장 식량부족부터해서 지역경제에 상당한 충격이 있었다. 1948년 4.3사건으로 다시 수 만 명 이상의 제주인들이 부산 영도와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인 공동체가 있었던 일본 오사카 일대로 이주했다. 그로 인해 오사카에는 제주인 출신 재일동포들이 상당히 많다. 제주도 사람들 중에서는 일본에 친척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지만 조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가까운 친인척 중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여럿씩 있었다. 인구의 1/3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제시대부터 일본으로 이주한적이 있거나 나중에 이주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던 도이다. 그럼으로 한일혼혈들도 많았고 재일 조선인 후손들도 많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한국에 방문한 재일교포들이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간첩 사건 등 [[조총련]]과 엮여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간첩조작 사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POD&mid=tvh&oid=214&aid=0000053224|#]]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POD&mid=tvh&oid=057&aid=000013568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