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자 (문단 편집) === 창시 === 한자라는 문자가 구체적으로 언제 창제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 신화]]에선 [[삼황오제]]기의 [[황제(중국 신화)|황제(黃帝)]] 대의 [[창힐]](倉頡)[* 푸를 창(蒼)으로 쓰기도 한다.]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설상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사기]]나 여씨춘추 같은 문헌에도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전설은 [[전국시대]] 말에는 널리 퍼진 듯하다.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 6천년경 [[신석기 시대]] 전후로 중국 일부 지역에서 상형기호들이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대체로 황하강 근처지만 저장성 량주에서도 기원전 3000년경에 기록된 기호가 발견된다. 그 중 유명한 '한자의 기원일지도 모르는 문자'는 [[허난 성]] 일대의 페이리강 문화 지역에서 발굴된 자후 계각 부호(賈湖契刻符號)인데, 기원전 6600년 무렵에 형성된 듯하다. '문자'가 아닌 '계각부호'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 기호가 문자라면 과연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지 논란이 되기 때문이다. 글자가 아니라 그냥 '문양'일 수도 있다는 뜻. 해석은 고사하고 과연 문자가 맞는지도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후에 등장할 [[갑골 문자]]와 비슷한 꼴도 있기 때문에 한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현재 알려진 갑골 문자는 총 5천 자 정도인데 이 중 2500자 정도만 해독이 된 상태이다. 갑골문과 더불어 한자의 조상 격이 될 수 있는 문자가 전자(篆字)이다. 현대 한자의 원형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최초의 문자는 그 유명한 [[갑골 문자]]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갑골문은 기원전 약 1200년경의 [[상나라]]의 왕 무정(武丁) 대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미 한자의 틀이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로 쓰인 문헌이므로 실제 한자의 탄생은 그보다 이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쯤 전설상의 국가로 여겨지던 상나라의 존재를 증명하고, 더불어 당대의 수많은 기록과 한자의 원형을 명확히 하는 등 중국 고대 역사학에 상당한 공헌을 한 기념비적인 발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한 문자들이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에 연구가 거듭되면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실들을 알아낼 수도 있다. 갑골문은 상나라 말기부터 [[주나라]] 대에 걸쳐서 청동기에 새겨졌다고 해서 명명된 금문(金文)으로 이어졌다. 위의 갑골문과 비교적 잘 알려진 후대([[진나라]], [[한나라]] 대)의 문자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후대 문자에 비해 자형이 상당히 이질적인 갑골문을 해독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서]]체가 등장하여,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저서(그때는 종이가 없어서 죽간에 쓰여졌다.)도 전서로 쓰였다. [[진시황]]의 시대에 이르면 필기체인 [[예서]]체가 등장하고 [[한나라]]대에 기존의 전서를 대체한다. 또 [[삼국시대(중국)]]에 이르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해서]]체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한자의 자형이 거의 완성된다. 해서체는 가장 많이 사용되고 완성도도 높기 때문에 아예 정체(正體)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남북조 시대]] 전까진 해서체가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완성되고 널리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대이다. * 한자 자원(字源) 연구 한자 자체를 두고 체계적으로 지식을 갖춘 계기는 경학 연구이다. [[분서갱유]]로 웬만한 경전이 통째로 사라진 뒤 한나라가 들어섰다. 중국 학문계가 상당히 붕괴하고 혼란스러웠을 때 절반 정도는 학자가 몰래 숨겨왔던 경전이나 공자 집에 들어차 있던 경전에 적친 고문을 해석하던 고문파, 하나는 끝까지 찾지 못해 입으로 전승돼오던 사실을 기록해 [[예서]]로 남겨놓은 금문파로 연구자가 나뉘었다. 이들은 연구 방법이 달랐으므로 학풍 역시 달랐다. 고문파는 글자 해석부터 어려웠으므로 고답적으로 정론을 파고들었고, 금문파는 따로 해석할 거리는 없었고 내용의 이해에 어려움이 없어 현실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으나, 참위설이나 음양오행설을 가지고 억지 해설을 늘어놓는 등 영 안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를 고문파의 일원이었던 후한의 허신(許愼)이 문자의 구조를 분석하는 기법을 최초로 들고온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소전]]체를 파고들어 의미를 분석하는 기법을 보여주며 논란이 끝났다. 이때 나온 기법 중에 [[육서]]와 [[부수]]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