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태석 (문단 편집) == 청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한태석 == || 성명 ||한태석(韓泰錫) || || [[본관]] ||[[청주 한씨]] || || 생몰 ||[[1876년]] [[2월 5일]] ~ [[1949년]] [[10월 15일]] || ||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분향리 || || 사망지 ||[[충청남도]] [[청양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한태석은 1876년 2월 5일 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분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 소재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4월 홍성에서 거병한 [[민종식]] 의병장의 부대에 동생 [[한훈]]과 함께 가담해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독자적으로 충남 홍산 지치마을에서 청년 수십명을 모아 이웃의 구병, 문장, 서천 등지에서 잇달아일본군과 교전했고, 홍주성 전투에도 참가했다. 또한 1906년 5월에는 서산, 해미, 예찬, 대천, 광천 등지에서 청년을 모아 의병대에 합류시켰다. 도중에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될 뻔했지만 동지와 같이 변장해 탈출하면서 위기에서 멋어났다. 그 후 민종식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정진하다가 1915년 [[박상진]], [[채기중]]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들이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동생 한훈, 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무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귀국한 임시정부 요원 한우석(韓禹錫)이 붙잡히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1월 충남지역의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충남 대덕군 기성면의 부호 정순학(鄭淳學)에게 군자금을 요청, 그로부터 200원을 받아 나오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청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태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청주 한씨]][[분류:청양군 출신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194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