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푸쥐 (문단 편집) === 산동왕 시절 === 1931년 [[1차 양광사변]] 때 장제스의 편을 서 스여우싼을 축출하였고 1932년 산동 동부의 유진년(劉珍年)을 축출하고 산동성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해에 과거 산동을 지배했던 군벌 [[장쭝창]]이 [[만주사변]]을 틈타 항일을 주장하며 산동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동으로 돌아오자 [[스여우싼]]을 시켜 장쭝창에게 숙부를 잃은 산동정부 부총참의 정계성을 사주하여 장쭝창을 피살하게 했다.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시작하자 [[중국 국민당]] 산동성 당부를 통해 산동성 신생활운동 촉진회를 성립시키고 각 현에 분회를 설치하여 신생활운동의 보급에 나섰으며 [[쑹메이링]]이 부녀지도위원회 지도장에 취임하자 자신의 아내인 고예진을 시켜 산동성 부녀도덕 촉진회를 조직했다. 1935년 이후 일본의 [[화북분리공작]] 때 [[옌시산]] 등과 함께 회유를 받았지만 묵살했다. 1936년 [[수동사변]]이 발생하자 제남에서 [[장제스]]와 회담하며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1936년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쑹저위안]]과 함께 장제스 처형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옛 상전인 [[펑위샹]]의 6전구에 배속되어 [[쑹저위안]][* 전 29군 군장, 1집단군 사령관.], [[쑨롄중]], [[스여우싼]] 등과 함께 화북에서 항전에 나서 산동성 정부 주석 겸 3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하지만 과거에 한 진영이었으니 지휘가 용이할 것이라는 장제스의 예상과 달리 한푸쥐 등은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