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푸쥐 (문단 편집) === 적전도주와 죽음 === ||[[파일:1938년한복구.jpg]]|| || 중일전쟁 시기의 한푸쥐 || 1937년 9월, 일본군이 [[옌시산]]의 영지인 산서성 공격을 감행하자 장제스는 한푸쥐에게 일본군의 측면과 후방을 교란시켜 일본군의 산서성 공격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으나 한푸쥐는 산동성 남쪽으로 멋대로 퇴각해버렸다. 결국 10월 26일 일본군이 낭자관을 함락시키고 산서성의 성도 타이위안을 공격, 11월 8일에 함락시켰다. 1937년 12월 23일 일본군이 산동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12월 26일 [[지난]]이 함락되고 1938년 1월 10일 [[칭다오]]도 점령당했다. 한푸쥐는 부하들을 버리고 산동성 정부의 국고와 은괴를 챙겨서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주했다. 쑹저위안과 쑨롄중 역시 펑위샹의 전선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퇴각했고 방어선이 와해되어 화북 전역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고 펑위샹은 패전에 책임을 지고 6전구 사령관직에서 사임했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6전구는 폐지되었다. 한푸쥐의 비겁한 적전도주에 격노한 장제스는 1938년 1월 11일 카이펑에서 1, 5전구 단장 이상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고위 장교들의 군기가 부재한 것과 명령 불복종 관행이 만연한 것이 중국군의 가장 큰 패인이라고 지적하고 한푸쥐를 꾸짖었다. 그러자 한푸쥐는 나는 산동을 잃은 책임을 진다지만, 난징을 잃은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라고 장제스에게 대들었다. 격노한 장제스는 그 자리에서 한푸쥐를 체포하고 군기 쇄신 차원에서 한푸쥐를 면직시키고 우한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또한 한푸쥐를 포함하여 멋대로 후퇴를 감행한 여단장 급 이상 고급장교 41명을 전격적으로 체포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1938년 1월 24일, 한푸쥐 등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고 공개처형되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국민혁명군]]의 기율 향상과 단결에 기여했다. 물론 끈 떨어진 신세인 한푸쥐가 만만해서 손쉽게 죽였다는 다소 냉소적인 평가도 있긴 하다.[* 예컨대 광저우를 사수하던 [[위한머우]]는 적전도주하고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서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