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복 (문단 편집) ==== 사카이 사건 ====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사례 중 유명한 것으로 '''사카이 사건(堺 事件)'''의 할복을 들 수 있다. [[https://ja.wikipedia.org/wiki/%E5%A0%BA%E4%BA%8B%E4%BB%B6|일본 위키의 사카이 사건 항목.]] 사건과정을 살펴보면 메이지 원년인 1868년, [[무진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인 2월. 이때 [[오사카]] 근처 [[사카이시(오사카)|사카이(堺)]]에는 신정부군 측 [[도사 번]]의 보병대가 주둔해서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임에도 [[프랑스 해군]] 일부가 상륙하여 소동[* 술 처먹고 [[여자]] [[성희롱]]하는 수준의 그 소동이다.]을 벌여 토사 보병대가 이들을 군함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한 프랑스 [[수병]]이 토사 측의 [[군기]]를 빼앗아 달아나는 장난을 쳤고, 열받은 토사 측 기수대장이 쇠갈고리를 던졌는데 ---매우 재수없게--- 이게 이 수병의 뒤통수를 맞춰 버렸던 것. 그 즉시 양쪽에 총격전이 발생하였고,[* 어느 쪽이 먼저 발포하였는지는 양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만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 사후처리에서 보인 [[일본]]의 저자세를 볼 때 일본 쪽이 먼저 발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프랑스 수병 11명[* 혹은 13명으로도 추측된다.]이 사망하였다. 이에 열받은 프랑스 공사는 일본 조정에 토사번주의 직접 사과, 배상금 지불 및 사건을 저지른 병사 20명의 사형을 요구하였고, 일본 조정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병사들은 임무를 수행한 자신들을 사형시킨다는 사실에 매우 큰 불만을 가졌고, 이에 불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책임자인 토사번은 이들에게 '''할복을 허락한다.''' 그리고 묘고쿠지(妙國寺)에서 프랑스 공사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와 [[프랑스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 다수에 [[어네스트 사토]] 등 [[영국]] 공사관 직원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사상 최초로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쇼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이때의 할복쇼가 [[에도 시대]]의 배를 긋는 시늉을 하는 참수형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고 [[똘끼]] 충만하던 [[센고쿠 시대]]의 [[의도하지 않은 연기|레알 유혈 낭자쑈]]'''였다는 것.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할복자인 토사번의 병사들이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였고, [[존왕양이]]의 신념으로 봉기한 자들로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하게 된데다, 하급 [[사무라이]] 계급 출신들로 성정이 과격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하게 되었으니, "자존심 때문에서라도 정말로 진짜배기 할복을 보여주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당연하지만 단순히 [[참수형]] 정도로[* 사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981년에 [[사형]]을 폐지하기 전까지 일부 [[총살형]] 사례를 제외하면 사형에 [[단두대]]를 이용한 [[참수형]]을 고집했고, 1977년에 있었던 마지막 사형 집행도 기요틴으로 할 정도로 참수형에 익숙한 국가다. 더군다나 사카이 사건이 벌어진 19세기 중엽은 [[공개처형]]이 기본이었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공개처형 제도는 1939년에야 사라진다. [[2차대전]] 직전이 시대적 배경인 영화 [[빠삐용]]을 보면 죄수의 공개처형이 묘사된다.] 생각했던 프랑스 [[공사]]와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받았다. 심지어 특히 최초의 할복자인 미노우라 이노기치의 경우는, 정말로 이게 가능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유혈 낭자쇼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미노우라는 일단 프랑스 공사에게 '''"지금부터 잘 봐라!"'''라고 큰소리로 선언한 뒤, '''배를 가르고 손을 넣어 [[창자]]를 [[장기자랑(은어)|꺼내 집어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이샤쿠가 목을 칠 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적중하지 않자 '''"좀 더 침착하게 치게!"'''라고 큰소리로 격려했다고 한다. 2번째 칼질 역시 제대로 먹히지 않자 장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다시 쳐라!"'''고 외쳤다고 한다. 결국 3번째 칼질에 사망했는데, 이 첫 할복부터 프랑스 공사의 [[멘탈붕괴|멘탈이 붕괴]]하여 새파랗게 질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후 할복자들 역시 전원이 진짜로 배를 갈랐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내장을 꺼내놓고 그걸 정렬한 다음, 피 묻은 손으로 모래바닥에 '나 죽는다'고 ~~인증~~ 쓴 다음, 그 '''내장을 프랑스인들을 향해 집어던졌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어느 할복자는 처음에 배를 가른 것이 얕다고 여겨 다시 한 번 그었다거나, 어느 할복자는 배를 좌우 다른 방향으로 2번 그어 창자가 땅에 쏟아지는 연출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들에 따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지만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그래도 충분히 엽기적이라고 할 만큼 유혈이 낭자했다'''.]] 마침내 참다 못한 레온 로슈 프랑스 공사는 [[빤쓰런|현장에서 탈출해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토사번은 일단 형집행을 멈췄다. 이 시점에는 11명이 할복을 하였고, 9명이 대기 중이던 상황. 그리고 레온 로슈 공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감탄했으나 너무 처참하므로 더 지켜볼 수가 없다"고 밝히는 한편 "남은 9명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정부에 건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남은 9명은 [[유배]]형으로 사면되었다. 이들은 비록 유배형 처분을 받았으나 칼을 차고 가마에 탄 채로 유배지로 떠나는 등, 사실상 극진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후 유배지에서 1명이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1년도 안 된 [[메이지 덴노]]의 즉위를 핑계로 완전 사면되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프랑스 공사인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는 이날 일기에 기록을 남겼는데, 그들에게 동정을 느낀 동시에 이런 형태의 처형은 [[프랑스]] 측이 원하는 대로 '''책임을 묻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순국|반대로 할복자들이 영웅시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중단시킨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영국]] [[외교관]]인 [[어네스트 사토]]는 자신의 저서에 "[[정신승리|온 힘을 다해 이 형벌을 입회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그냥 옆에 [[영불관계|프랑스 공사 일행이 있어서]] 억지로 버틴 것 같긴 하다만.-- 이 할복 중지 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1주일 뒤에 영국 공사 일행이 길거리에서 양이지사 2인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명의 [[자객]] 중 하야시다 사다카타(林田貞堅)[* 별칭은 '스자쿠 미사오'(朱雀操)이며 일본 위키에는 별칭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습격 직후 [[호위]]였던 [[사쓰마]] 번사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와 도사 번사 고토 모토하루(後藤元曄)[* 통칭은 쇼지로(象次郞)]에게 격퇴당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고(!), 나머지 1명인 사에구사 시게루(三枝蓊)는 영국인 호위병 몇 명에게 상처를 입히며 영국 공사 파크스 쪽으로 돌진했으나, 어네스트 사토가 직접 달려들어 칼을 빼앗는 바람에 결국 생포되었다. 덧붙어서 범인 2명 모두 사진이 남아 있다. 사에구사는 처형 2시간 전에 서양인들에 의해 초상 사진을 남겼고, 하야시다는 잘린 머리의 사진이 공개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