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대결전 (문단 편집) == 함대결전사상과 그 허점 == 함대결전사상은 "결정적인 전투(Decisive Battle)"을 제대로 고찰 하지 않고, 결정적 전투를 전근대적인 '[[회전#s-2]](會戰)' 개념으로 국한시킨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런 회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쟁 당사자들이 모두 회전을 원해야 하는데, '''[[현존함대|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쪽은 당연히 회전을 기피하게 된다.]]''' 전력을 다 모아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거나 불리하다면 상대방이 한 방에 잡기 쉽게 일부러 전력을 모아서 던져주지 않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측은 전력을 모으더라도 적의 주력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적의 전력을 깎아 먹는 길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한쪽이 원하지 않는 전투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외교나 정치, 전략적으로 한 쪽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 어려운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대함대전을 유도하는 것 또한 함대결전사상의 일부분이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구시대적인 실책이라는 평을 듣는 것. 무엇보다 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외교나 정치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하는 건데, 스스로의 힘으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외교에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군대 전술이라면 그건 이미 [[손자병법#s-2.1|전쟁에 쓰기에는 실격]]인 셈이다. [[유틀란트 해전]]의 예에서 보듯 전력상 불리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의 주력에게 공격받자 이전에 짜놓았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야간을 틈타 도망갔다. 설상가상으로 함대결전사상의 이론의 일부는 회전(會戰)보다도 더 뒤떨어졌다. 회전이 전근대적 사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개별 군주/국가의 권력과 대민 통제력이 약하고 농업생산량이 부족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었던 봉건사회에서는 전력이 뒤쳐지는 쪽도 마지못해 회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런 전근대적 시대라고 해도 회전이 단 1번 벌어지고 그걸로 대세가 결정되며 모든 것이 끝난다는 식의 웃기는 이야기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장 가장 성공적인 회전 승리 및 속전속결 사례로 적용되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하는 전쟁에서도 [[그라니코스 전투]]와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이라는 2차례의 거대한 회전을 치르고 나서야 [[가우가멜라 전투]]라는 마무리 회전을 벌일 수 있었고 그 후에도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추격전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까지 가는 대전진 끝에야 전쟁이 끝났다. 그나마 이것도 매우 성공적인 경우였고 [[한니발 바르카]]같은 경우에는 상대가 [[로마 공화국]]이라서 회전을 여러번 벌여서 승리한 끝에 [[칸나이 전투]]라는 끝판왕급 회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모전]]에 제대로 걸리고 카르타고 본국이 제대로 못싸우는 바람에 결국 [[자마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패배로 종결되었다. 또한 전쟁의 흐름이 [[총력전]]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1차례의 결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육상에서는 결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곧, 해군이 설령 진짜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해권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차지한다 하더라도, 승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번 제대로 패전을 겪으면 영원히 복구가 안되는 위험을 지는 판에, 진짜로 제대로 함대결전을 잡아 이겨 제해권을 진짜로 영구히 장악해도, '''총력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즉, 이익 자체는 엄청나긴 한데 그 무시무시한 이점을 확보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안 되는게 총력전이고, 이는 그 귀한 함대들이 결전에서 삐끗해 일시에 몰살 당할 위험을 그 누구도 지고 싶어하지 않게 만든다. (이 또한 고전시대에서 부터 이어저오는 해군사의 전통이다! 승선전투가 핵심이던 시절에도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서 밀리면 결국 이겨도 이긴게 아니었다.) 결정적 전투에서 패배해서 제해권을 해당 전쟁에서 영구적으로 상실하는 전훈들이 실제로 많이 있어왔긴 하나, [[러일전쟁]]에서 발트 함대가 한 차례의 해전으로 궤멸된 것과 같은 '대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의 러시아 해군은 [[발트해|러시아의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로 원정을 가야하는 특수한 상황에 있었고[* 애초에 두 개 이상의 대륙에 걸쳐 서로 분리된 바다를 다스려야 하는 나라 자체가 드물다. 여러 대륙에 걸쳐 성공적으로 해상을 지배한 나라는 [[대영제국]] 외에는 없었고, 그 영국 역시 [[말레이 해전|일본에게 한 대 제대로 맞고 나자]] 태평양 전쟁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즉, 일본의 함대전략은 수 개 이상의 대륙에 걸쳐 영토를 가진 제국과 전쟁을 하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에서라면 확실히 유효했다.], 함대 전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에 끌려들어가 결정적 패배를 당해 '소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가 결정적 패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교전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것이 매우 흔했고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함대결전을 갈구하게 만들기도 한 것인데, [[일본 제국]]은 이런 본질을 대부분 무시하였다. 게다가 발트 함대가 소멸해버리긴 했어도 [[러시아 제국]]은 여전히 추가적인 해군력 동원이 가능했었다. 단지,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국내 정세가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 졌기 때문에 발을 뺀 것이다. 오히려 한 번의 결전으로 한 나라의 [[해군력]]이 와해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애초에 함대결전사상의 기반이 된 [[쓰시마 해전]]부터가 서양에서는 근대 해전사에서 '''[[트라팔가 해전|트라팔가]] 이후 최악의 참사'''로 유명하다. 제해권에서의 열세는 결국 이러한 참사, 곧 피할 수 없는 결정적 패배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나, 그것이 쓰시마 해전 마냥 아주 깔끔하고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 형식으로 실현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즉, 대규모 함대전을 통한 결정적 승리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례'''인 셈이다. 결국 함대결전이라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야 정상인 문제를, 그걸 노릴 역량도 안 되는 판에 다른 가능한 대안 마저 모조리 배제하고, 쓰시마 해전 같은 특수한 사례 재현에만 목을 매달았으니 문제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더군다나, 설령 이게 잘 풀렸다 해도, 상술 했듯 [[총력전]]에서 해군이 결정적으로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 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으로만 한정해봐도,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자원과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대규모 해전에서 한두번 패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걸로 전쟁을 끝낼 가능성은 없었다. 실제로도 [[진주만 공습]]에서 기습 공격을 제대로 먹은 미 해군은 전투력 면에서는 반쯤 소멸했었다. [[초강대국|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상실한 제해권 하나 만으로 전쟁에서 질 나라가 절대로 아니었다.]] 당연히 최종적 결과는 미국의 승리였다. [[일본 제국]]의 발상은, 상술했듯 함선의 기나긴 건조기간과 초월적인 비용 문제에 입각해서 "[[귀차니즘|여기저기서 깨작깨작 싸우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한타 싸움에서 [[진주만 공습|크게 한 번 이기면]][* 실제로는 진주만 공습조차 크게 이긴게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경제력을 심각하게 낮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함대가 유류저장시설과 수리도크를 공격대상에서 제외했고, 그 덕분에 살아남은 미 태평양 함대의 잔존전력은 그대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의 수심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미 해군은 [[펜실베이니아급 전함|애리조나]]를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전부 건져내서 수리할 수 있었다. 즉 일본 해군이 역사적인 대승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진주만 공습의 효과는 고작 6개월 아무리 잘봐줘야 1년이었고, 도리어 미국이 전후 경제에 대한 생각은 뒷전으로 미루고 복수에 눈뜨게 하는 전개를 맞이한다.] 그 다음부턴 [[태평양 전쟁|전쟁 끝날 때까지 부담없이 쟤네들 바다 휘젓고 다닐 수 있겠다]]"는, '''맞는 말이면서도''' [[총력전|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총력전 연구소|미국과 맞붙어 이길 가능성이 절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미군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고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제대로 된 한타 싸움 이전에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군의 전력을 갉아먹어 외교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이래도 듣지 않는다면 피폐화된 미군을 자신들의 준비된 주력전력으로 상대하여 격멸시키겠다는 [[점감요격작전]]이다. 하지만 이 점감요격작전은 근본적으로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쟁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결전 사상"을 전제로 한 구상이었고, 국가의 산업생산력과 동원력 증대로 인해 그 단 한 번의 결전이 존재치 않는 [[소모전]]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수많은 점감요격이 있을 뿐 함대결전은 존재치 않는다면 생산력에서 극히 열세한 일본이 미국에게 이길 방법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 들이닥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 제국은 "산업 시대의 강대국간 총력전에 함대결전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웅변하는 살아있는 교보재가 되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주력 항공모함 4척을 단 하루만에 격침당한 해전]], [[필리핀 해 해전|정규 항공모함 3척에다가 500기에 가까운 항공기를 상실한 함대항공전]], [[레이테 만 해전|역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이자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이 침몰하는 대해전]]을 치렀으며, 그 결과 전쟁 내내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결코 전쟁수행의지를 꺾지 않았다'''. 자신들이 갈고닦은 [[함대결전]] 사상에 따르면 이러한 결전에서 패배한 국가는 항복하거나 강화를 요청하였어야 하나, 막상 스스로 그 처지가 되어버린 일본은 항복 따위는 [[이오지마 전투|전쟁 말기까지]] [[오키나와 전투|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이 최종적으로 전쟁수행의지를 꺾은건 결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폭을 2발이나 얻어맞고]], [[만주 작전|천황제의 유지도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한 후]]였다. 어찌 보면 결전은 결전이었다. 다만 전통적인 함대결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핵전쟁|새로운 시대의 결전]]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