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박도 (문단 편집) == 상세 == 한민족이 함박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대동여지도]]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경기도]] 교동군[* 이후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강화군과 병합]의 경계 바깥에 함박도가 위치한다. 다만 어느 도에 위치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황해도 연안군의 도계가 끊어진 부분을 이으면 함박도가 포함되긴 하나, 실제 인식이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의 [[동국지도#s-3]] 판본 중 함박도를 경기도로 표기한 [[http://archive.museum.seoul.kr:8090/ARCHIVE_DATA/view/1011/A000000247/view_87e2bc8b-7acb-4dec-a836-07877bf39575.jpg|부분]]이 존재하는 등, 조선 시기 함박도를 둘러싼 해상경계 인식은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호한 인식은 일제에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1927년에는 함박도 근처에서 범선 한 척이 전복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를 다룬 [[https://www.nl.go.kr/newspaper/sub0101.do?id=CNTS-00093352941|기사]]는 함박도를 [[황해도]] 연백군 연해로 표기하였다. 1940년에는 이 모호한 경계로 인한 분쟁이 발생하는데, 당시 황해도 연백군은 함박도가 연백군 해성면 매정리의 섬이라며 강화군에 출어 제한을 통보하였고, 강화군은 역사적으로 강화군에서 조업하였으며, 일제의 육지측량부 지도의 표기를 근거로 이 곳을 강화군이라고 주장하며 조사단을 연백군에 파견한 바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4183913|기사 참조]]. 다만 연백군이 무엇을 근거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또 당시의 행정적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남북분단 과정에서 함박도 인근은 격변을 맞는다. 6.25 전쟁 전까지는 연백군은 38선 이남에도 있어 이 부분을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했고, 함박도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은 [[황해도]]와 [[경기도]] 도계선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도서 중,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및 [[우도(서해 5도)|우도]]의 도서군을 제외한 기타 모든 도서를 북한의 군사통제하에 둔다고 규정하며, 부속지도에 경계선을 표시하고, 해당 도서군에 테두리를 표시하였다. 당시 부속지도에서 함박도와 우도는 [[황해도]] 남쪽, [[경기도]]의 이북에 있는 도서로 표기되었다.[* 1999년에 NLL에 대해 기고문을 썼던 [[리영희]]는 같은 자료를 인용한 논문에서 함박도를 도계선에 겹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는 원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전협정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함박도는 북한의 관할로 정리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박정희]] 집권기인 [[1978년]]에 미등록도서 지적공부 사업을 통해 함박도를 [[강화군]] 관할 주소로 등록하면서 현재의 주소를 갖게 되었다. 당시 행정이 어떠한 이유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당 사안을 팩트체크한 KBS는 70년대 당시 북한의 NLL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주변 도서들을 등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는 별개로, 함박도는 오랫동안 강화군 어민들이 이용하던 섬이었다. 이는 휴전 직후에도 지속되었는데, 1954년에는 강화도 어민들이 함박도 인근에서 새우잡이를 하다 난파하여 납북되었다 돌아온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11200020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11-20&officeId=00020&pageNo=2&printNo=9760&publishType=00020|기사]]가 존재한다. 1965년에는 인근 말도 어민들이 함박도와 은전도 근처에서 조개를 캐는 도중 갑자기 북한군이 나타나, 112명이 납북되었다 8명을 제외한 104명이 송환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함박도는 휴전선 남방이라고 항의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10100209201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1-01&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48&publishType=00020|기사 참조]]. 이때 끌려간 사람 중 일부는 나중에 미법도 간첩단 조작 사건[* 단일 사건은 아니고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끌려갔다.]으로 인해 옥살이를 하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들을 심문한 사람 중에 악명높은 [[이근안]]도 있었다. [[http://www.gang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6|강화뉴스]],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05000/2007/11/021005000200711010683009.html|한겨레21]], [[http://yna.kr/AKR20120903189000004|연합뉴스]] 한편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훈장#s-5.6|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은 2인에 대하여 [[2019년]] [[5월 7일]] 서훈이 [[https://www.mois.go.kr/frt/bbs/type010/common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08&nttId=70505|취소]]되었다.[* 훈장 실물을 압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민들의 경제활동은 73년 이후 북한이 NLL 인근에 경비정 수십척을 투입해 무력시위를 벌이고, NLL 관련 분쟁이 본격화되면서 통제가 강해졌고,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민들은 밝혔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25&aid=000293956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