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동출판사 (문단 편집) === '소년한국'과 '합동' === >'건전한 만화로 건전한 어린이를 기르자’는 뜻 아래 소년한국일보는 우수만화 출판사업을 벌이기로 하여, 그 첫 시리즈가 오는 1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발매됩니다. 4×6배판 100페이지의 부피에 ‘오프세트’ 인쇄로 매일 15종씩 발간될 이 만화책은 재미있고 명랑하고 밝은 내용을 참신한 ‘스타일’로 꾸며 6백만 독자의 어린이만화책에 ‘새롭고 즐겁고 건전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보다 혁신적인 우수 만화의 제작을 위해 만화 작가 50여명과 아동문학가, 극작가 20여 명을 동원한 황금의 집필진이 갖추어졌으며 전국의 영업소 및 한국일보의 각 지사, 지국, 보급소를 통해 어린이 만화 도서실에 배본됩니다. 명랑한 어린이의 양식으로뿐 아니라 사회의 명랑화를 위해서도 보탬이 될 이 소년한국일보의 만화를 일반 가정과 교육계에서 안심하고 권장해주시고 또한 적극 성원해주시길 바랍니다. > >- 1973년 1월 7일 소년한국일보가 낸 알림 기사. >소년한국 초창기에 [[장기영(1916)|장기영]] 씨가 본인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대문구 노라노예식장 뒤편에 있는 자기 집에서 아침 일찍(오전 6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만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나는 이에 대해 5일간이나 강의를 했다. 나는 "5백~6백만원 정도 투자해서 몇몇 인기작가를 데려오면 싸움은 끝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촌(합동출판사)과 경쟁하도록 부추겼다. 나는 예전의 합동에 당했던 쓰라림을 기억하면서 소년한국일보사가 경쟁을 통해 이겨줄 것을 은근히 바랐는데, 결과는 만화유통 지분을 '한국'과 '합동'이 나눠 갖게 되는 것으로 낙착이 났고 또 이로 말미암아 독점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말았다. 나는 결국 만화유통계에 새로운 독점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꼴이 되고 말아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 >- 전 한국만화출판인협회 회장 박봉희 씨 증언 합동의 독점에 반발한 군소 출판사들이 하나같이 참패를 면하지 못하자 [[한국일보]]의 자회사인 소년한국일보사가 1971년[* 출판사 등록은 1972년 2월 3일에 했다.]에 이르러서 만화출판/유통업계에 투신하며 합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에 앞서 한국일보는 1968년에 자매지인 <주간한국>을 통해 '만화왕국 신촌대통령'이라는 제하의 기획기사를 통해 합동의 만화 유통독점과 이영래 회장의 만화계 전횡을 샅샅히 고발하는 한편 한국일보의 사설까지 동원해 합동의 부조리를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일보의 이러한 비판은 합동에 이은 또 하나의 독점 만화유통체제를 만들기 위한 터 다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3년 1월, 소년한국일보사는 "합동동우회의 독점사업을 깨뜨리고 대본업자와 만화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며 아동만화 출판업계의 정화 및 정상화를 기하겠다"는 사업취지를 내세워 합동과의 일전을 시작했다. 영세 출판업자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합동'이라는 독점 체제를 완성했던 만화유통 시장에 조직과 자금력을 갖춘 대형 언론사가 뛰어든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소년한국일보사에서 만화출판을 전담했던 만화운영팀의 책임자는 고봉진, 제작판매는 장기태 총무이사가 맡았으며 초창기 전속 작가로는 박기정 그룹의 작가 7~8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소년한국일보는 당시 만화계에서 일본 만화를 복제/전재하고 있다는 눈총을 받아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재화 화백은 자서록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는 오랜만에 신동헌 씨와 김경언 씨를 만나 한자리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소년한국' 이야기가 나왔다. (중략) 나는 한국일보 이전 태양신문에 관계했던 일로 장기영 사장과는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중략)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김경언 씨는 소년한국의 만화를 지적하면서 사장에게 한 마디 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소년한국에는 임창 씨가 주로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거의가 소년한국은 일본 만화를 그대로 복제 게재하여 소위 일간신문의 체면도 생각 못하고 한편 한국 만화를 똥칠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하튼 '소년한국일보'를 앞세운 언론 재벌과 이영래의 '합동'은 1년 가까운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합동이 책값을 낮추자 소년한국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값을 낮추었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기작가를 데려오느라 양측은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등 치열한 제살깎기 전쟁을 치루었다. 만화 유통을 독점하겠다며 치열한 경쟁을 했던 합동과 소년한국 측은 결국 1년 사이에 모두가 1~2억원 대의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양측은 경쟁을 하는 와중에도 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을 진행했고, 1973년 12월에 마침내 두 회사는 각각 월별만화발행종수에서 60:40[* 실질적으로는 50:50이라는 얘기도 있다.]의 지분을 갖는다는 합의를 하고 패권 다툼을 종료했다. 이로써 새로운 독점 업체가 또 하나 탄생한 것이다. 이후 소년한국은 만화계에서 '또 다른 합동'이란 비난을 받으면서도 독점의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자체 만화작가의 양성에 힘을 쏟아 1973년부터는 신인작가 공모에 나섰다. 이 등용문을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작가가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만화가 [[김수정(만화가)|김수정]]이었다. 소년한국과 합동이 합쳐 새로 만들어진 '합동'은 만화책을 공동 출판하는 공판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지역 총판은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5개 총판 중에 소년한국 측은 김진, 이호열, 송상희 등이 3개소를 맡았고 합동 측에선 김승환, 홍순창 등이 나머지 2개 총판을 맡았다. 이들의 공동 만화유통 장악은 자유경쟁이 시작된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의 공동 판매체제에 관한 증거로 1976년에 만화방 주인들이 연대해 청와대에 보낸 진정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합동출판사의 간판 회사인 상록문화사(사장 이종세)가 아동 만화를 쉬지 않고 1종당 약 2,300권(1975년 3월까지 2,700권)씩, 매일 만화책 2만 3천 권을 냈으며, 전국 만화방에 공급하는 정가는 1백원이나, 외무원의 수수료 등을 빼면 85원 정도에 공급되어 연간 6억 5천만 원의 매상을 내 순 이익이 1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소년한국일보(사장 [[장강재]])는 합동과 동일한 면에서 공동 보조하여 같은 양의 만화책을 같은 값에 판다고도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