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동제국기 (문단 편집) == 내용 == [[세종대왕|세종]] 25년(1443)에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처음 [[대마도]], [[이키 섬]], [[일본]], [[류큐 왕국]] 지역을 견문했다. 이후 [[세조(조선)|세조]]시기에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면서 당시 왕 세조의 명으로 과거 자신이 다녀온 각 지역의 사회, 풍속, 문화, 지리, 생활상, 정치·외교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분류, 정리하여 성종 2년에 최종적으로 편찬한 책이다. 세종 25년(1443) 서장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세종에게 몇 장 안 되는 간략한 보고서로 제출하였을 때는 초주갑인자[* 세종 16년(1434 갑인)에 처음 주조한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는데, 이를 해동제국기 초조본이라 부른다. 이후 세조의 명으로 성종대에 완성한 해동제국기 최종본은 [[을해자]]체 목활자로 인쇄하였는데 을해자체 목활자란 세조 1년(1455 을해)에 세조가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와 글자체가 비슷한 나무활자를 말한다. 현재 초조본과 최종본 모두 현존한다.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본국도(本國圖), 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 이키도도(壹岐島圖), 대마도도(對馬島圖), 류큐국도(琉球國圖), 조선삼포도(朝鮮三浦圖) 등 여러 지역의 상세한 지도를 수록하였는데 앞서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에 비해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게 각 지역을 묘사했다. 특히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일본 지도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본 전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530.22022012951|해양문화의 명장면 <20> 조선의 '해동제국기' 왜 대단한가 15세기 지리정보 결합된 조선 시대 '아틀라스'(지도집)]]에 의하면, 세조 2년(1456) 5월 당시 조선의 왕 세조에게 명을 받은 일본인 승려 수린이 세조의 명에 따라 조선으로부터 일본 혼슈의 북쪽을 따라 항해하는 '북해항로'를 최초로 항해하였고 이를 신숙주가 책에 삽입하였다. 이는 15세기 이전 한국과 일본의 주요 내부 해로를 자세하게 남긴 유일한 자료라고 한다. 그 외에도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 일본 지도, 세계 최초의 인쇄지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집 등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체계적이어서 발간 이후 단순한 개인 기행문의 성격을 넘어 조선, 일본, 류큐 등 열국간의 외교 관례 지침서 역할을 했다. 15세기 일본 8도 66주와 대마도, 류큐국의 역사, 사회, 지리, 풍속, 정치, 역대 지배자, 언어, 각 지역의 지명, 외교관례, 왕래 연혁, 의복, 음식, 천황과 쇼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등을 상세히 수록하여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에 묘사된 15세기 일본의 풍속 중에는 일본의 전통문화뿐 아니라 오늘날과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몇 가지 대목을 보자면 아래와 같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집들은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다만 천황과 국왕이 사는 곳과 사원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해 길가에 다점을 두어 차를 팔게 되니 길가는 사람이 돈 1푼을 주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나라 문자를 익히며,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한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 >---- >『해동제국기』 국속 [[쇼군]]을 국왕이라고 칭했는데, 신숙주가 일본을 방문한 시기는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일본국왕]]으로 책봉된 시기로부터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임의로 붙인 명칭은 아니다. 나라의 실권이 [[천황|덴노]]가 아니라 막부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도 있다. 또한, 국왕(쇼군)의 세계 부분에서 그 나라(일본)안에서는 (쇼군)을 감히 왕이라 부르지 못하고 어소라고 부르며, 명령하는 문서도 명교서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정치와 외교에 천황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