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릉양왕 (문단 편집) == 개요 == >贊曰:海陵智足以拒諫,言足以飾非。'''欲爲君則弑其君,欲伐國則弑其母,欲奪人之妻則使之殺其夫.''' >찬하여 말한다. 해릉의 지혜는 거간에 족했고, 언변은 시비에 족했다.[* '거간'은 간언을 물리친다는 뜻이고, '시비'는 말을 교묘하게 얼버무린다는 뜻이다.] '''군주가 되고자 할 때는 그 [[금희종|군주]]를 죽이고, [[남송|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는 그 모친을 죽였으며,[* 생모가 아니라, 적모인 도단씨를 말한다. 죽인 다음 뼈를 불태워 물에 뿌려 버렸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는 아내를 시켜 남편을 죽였다.''' >---- >― 《[[금사]]》의 <해릉 본기> 논찬 [[금나라]]의 제4대 [[황제]]. 폐위되어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양'(煬)으로 [[수양제]]와 같은 시호다.[*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법]] 참조.] 보통 즉위 이전의 왕호인 해릉왕(海陵王)이라고 부른다. 즉위 전에 해릉군왕(海陵郡王)이었다. 《금사》(金史)에서는 [[폐제]](廢帝) 해릉서인(海陵庶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는 원공(元功), 휘는 완안적고내(完顔迪古乃), 중국식은 완안량(完顔亮). 아버지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완안종간|완안알본]](遼王 完顔斡本)이었다. 해릉양왕이 즉위하고 덕종황제로 추존했으나, 해릉양왕이 폐위된 이후 묘호와 시호가 삭탈되고 황자로 다시 격하되었다. 어머니는 대씨(大氏)로 발해의 왕손이었다. 이 외에도 발해인의 후예가 금 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사례가 꽤 있는데 발해인 출신인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1명과 12명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3명과 2명이었다. 황후는 여진 귀족인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 도단황후(徒單皇后)였다. 중국의 수많은 [[폭군]] 중에서도 3대 폭군에 들어가는 극악무도한 악행들을 저지른 황제였다. 나머지 둘은 [[후폐제(유송)]], [[수양제]]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게 황제 취급도 못 받아서 해릉양[[왕(작위)|'''왕''']][* 군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황족으로서 [[친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금사]]》는 해릉양왕을 왕으로도 취급하지 않아 아예 '해릉서인'이라고 칭했다. 해릉양왕은 [[칭기즈칸]]의 먼 선조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이자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 씨족의 조상인 [[암바가이 칸]]을 목마에 못박아 죽인 자이기도 했다. 금사를 편찬한 [[몽골제국]] 입장에서도 이 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사에서는 해릉양왕을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어서 명목상으로는 황제로 취급해줬다.[* 후술되어있듯 중앙 행정을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화 과정을 잘 수행했고 몽골을 잠시나마 억누르는 등 업적이 아예 없진 않았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