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릉양왕 (문단 편집) == 중앙집권화 == 폭군 중의 폭군으로 유명한 해릉양왕이지만, 금 왕조의 중앙집권화와 황제 독재 체제 강화에 대해서는 상당한 업적이 있다. 보수적인 여진 황족들을 숙청하여 황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모두 쳐내고 주요 관직에는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들을 임명해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이들을 선발했다. 또한 해릉양왕은 [[한자]]를 쓰고 시를 지을 수도 있었다는 [[희종]] 이상으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사서오경]], 시, 사, 가곡, 부를 읽고 감상할 수준의 '문화군주'였다. 물론 이 정도는 평범한 한인 학생도 갖춘 교양이지만, 삼림 수렵 민족 출신의 금 왕조는 [[화북]] 지역을 통치한 것이 채 30년이 안 되는 시점이고 전대 황제인 희종이 겨우 한자를 읽고 시를 쓸 정도의 교양을 지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대 여진인 귀족, 황족 중에서 해릉양왕만큼의 교양을 쌓은 이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릉양왕은 중국의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중국의 국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해릉양왕은 금 태종이 시행했던 [[한푸|한복(漢服)]] 금지령을 폐하고 중국 왕조들의 황실 의례를 도입했다. 기존에는 요 왕조 출신의 문인과 송 왕조 출신의 문인들 간의 학문 성향 차이를 배려해 만든 남, 북선 과거 제도를 일원화하고 송 왕조의 과거 제도를 모방하여 과거 제도의 개혁을 이루었으며 국자감 같은 고등 교육 기관도 설립했다. 여진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한인을 기용하는 해릉양왕의 개혁은 만주가 아닌 화북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기조 하에 이루어졌다. 해릉양왕은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가속하기 위해서 행정 개혁을 실시했다.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이 개혁은 1156년, 정륭 원년에 완성되어 '정륭 관제'라 부른다. 정륭 관제의 추진 목적은 여진 귀족의 영향이 강한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황제가 통제할 수 있는 상서성만을 운영하여 황권을 강화하고 상서성의 소속 기관으로 [[추밀원(중국)|추밀원]]을 설치, 황제가 군권을 틀어쥐기 위함이었다. 또한 수도를 상경에서 중도로 이전한 것은 여진 보수파 귀족들을 약화시키고 화북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 전체의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성공적이었으며 금 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진 세종도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 관제는 약간의 개정만 하고 그대로 운용했으니 희종이 도입한 3성 6부제를 해릉양왕이 금 왕조에 맞는 형태로 변화,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 관제는 금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는 확실한 공적이 있는 해릉양왕이지만, 위의 여러 문단에서 지적하듯이 그의 황권 강화 과정은 너무 조급하고 잔혹했다. 필요 이상의 [[학살]]과 엽색 행각, 수도 이전을 비롯한 토목 공사와 사치는 아직도 송 - 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민과 행정이 체계화되지 못한 금 왕조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민심이 이반하기에 충분했다. 세종, 장종대의 경제 성장을 '경제 회복'이라 평가할 정도로 세종 이전의 화북 지방은 송대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과다한 숙청, 사치, 토목 공사를 벌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군을 동원해 남송을 친다고 했으니 해릉양왕은 자기 손으로 목을 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릉양왕이 죽고 난 뒤에 즉위한 세종은 해릉양왕이 보수파 귀족들을 다 숙청해 준 덕분에 정변으로 황위에 올랐음에도 황권에 도전할만한 세력이 없어 상당히 편하게 황제 생활을 시작했고 해릉양왕의 폭정을 끝내고 과다한 세금 징수를 없애주는 것만으로도 성군 소리를 들었다. 국가의 행정 제도는 희종과 해릉양왕이 상당 부분 완성시켜 둔 상태였기에 세종은 이를 조정하고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해 금 왕조의 정치, 행정 제도를 완성시켰다. 즉, 해릉양왕은 [[죽 쒀서 개 준 꼴|죽 쒀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 되었다. 그가 숙청과 학살을 줄이고 엽색 행각과 사치를 벌이지 않았다면 해릉양왕은 금 왕조의 기초를 세우고 황권을 반석 위에 올린 황제로 평가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문제를 지적해주는 충신들은 죽이고, 반대파들은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학살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을 손에 넣어 지배층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폐위당할 명분이 되는데, 과다한 토목 공사와 세금 수취, 남송 정벌로 민심까지 잃고 끝내는 자신을 최후까지 지켜야 할 금군에게 살해당했다. 해릉양왕의 이러한 모습은 금 세종을 비롯한 후대의 군주들에게 반면교사의 예로 늘 인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