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그룹 (문단 편집) == 역사 == ||[youtube(7vBZUhBa6Us)]|| || [[소비더머니]]의 영상 || 1945년 [[박병규(기업인)|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적산기업 나가오카(永岡)제과 용산공장을 인수해 '[[해태제과|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세운 게 이 그룹의 시초이다. 1958년 해태산업을 세워 사세 확장을 시작해 1973년 해태식품을 세워 음료사업에도 진출했고, 다른 한편 농어촌개발공사로부터 한국산토리, 감귤냉장판매, 메도골드코리아까지 인수했다. 이후 1978년 해태관광, 1978년 해태상사, 1979년 신방전자, 1982년 코스코, 1986년 무궁화식품 등을 각각 인수/설립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식품 위주로만 사업을 확장했다. 그 와중에 1977년 공동창업주 박병규가 급서하자 공동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겼다. 이에 따라 장남 [[박건배]] 기획과장이 상무로 긴급 승진했고, 이후 1978년 전무,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등 3개사 사장이 되어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다. 반면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1981년에 해태관광을 들고 먼저 분가했고, 민후식의 아들 민병헌도 1988년에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해 동거 시대를 끝냈다. 박건배 사장은 취임 초기 불황 때문인지 내실을 중시했으나, 1983년 그룹회장으로 추대된 후 계열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으며 1984년 회장 부속실을 '종합조정실'로 개편해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열의를 보여 1981년 코래드를 세운 후 1983년 대아상호신용금고 및 한국커피, 1987년 미진금속을 각각 인수했고, 1994년 인켈, 1995년 나우정밀을 각각 인수해 정점을 찍어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로 국내 30대 기업 안에 들 정도로 규모가 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비식료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문어발식 경영, 총수의 대외활동 편중 등이 화를 불렀고[* 후술하겠지만 제과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자 사업이나 건설 사업 등에 손을 댄 것이 경영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찾아온 유동성 자금난의 여파로 2001년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해태제과 중국법인을 매각하면서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