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대교 (문단 편집) == 여담 == 구 행주대교에는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있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밤 당시 반란군인 [[하나회]] 소속이던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하나회 회장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지시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서울)|용산동]]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현 [[전쟁기념관]])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현 국방부 별관)를 점령하고자 [[강서구(서울)|강서구]] 주둔지에서 한강 이북으로 건너와야 했다. 강서에서 용산으로 가려면 [[한강대교|제1한강교]]나 [[잠수교]]나 [[한남대교|제3한강교]]를 건너야 했는데[*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시내의 자동차 횡단 가능 한강 교량은 행주대교, [[양화대교|제2한강교]], [[마포대교|서울대교]], [[한강대교|제1한강교]], [[잠수교]], [[한남대교|제3한강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잠실대교]], [[천호대교]], [[광진교]] 등 11개에 불과했다. 이중에 한강 이남에서 용산으로 직결되는 다리는 제1한강교와 잠수교 뿐이었다. 다만 빠른 점령을 위해서는 초고속 부대 이동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동거리가 가장 짧은 제1한강교를 노렸을 것이다.] 이들 교량은 진압군 측인 [[장태완]] [[소장(계급)|소장]]의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가 관할하는 지역이었고 다리 초소에 수경사 장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제30기계화보병사단|제30보병사단]] 관할 교량인 행주대교로 건너가고자 했다. 물론 수경사에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기에 장태완 사령관이 30사단장인 박희모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건너려 한다. 행주대교를 막아달라"고 요청했지만 하필이면 그 전화를 반란군의 핵심인 [[국군보안사령부]]가 전부 도청했다. 보안사 간부들은 득달같이 박희모 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박 장군이 장태완 장군과 통화한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1공수가 서울에 진입할 수 있도록 조용히 행주대교를 열어달라. 그러면 모든 일이 조용히 해결될 것이다"라고 진압군 측 요청을 무시해달라고 압박했다. 사단 사령부에서는 1공수의 강북 진입을 열어주기로 했으나 행주대교 검문소에는 이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탓인지 남단 쪽 검문소에 있던 30사단 소속의 [[군사경찰]]이 1공수와 마찰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30사단 군사경찰은 1공수 요원들에게 제압됐고 1공수는 행주대교를 건넌 뒤 용산 육본과 국방부로 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2023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영화)|서울의 봄]]>에서는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수경사령관]]인 [[장태완|이태신 장군]]([[정우성]] 분)이 혈혈단신으로 행주대교로 가서 서울로 진입하려던 2공수여단의 행렬을 홀로 막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이는 실제가 아닌 허구이며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 당시 필동 수경사령부 상황실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혈혈단신으로 상대 탱크 행렬을 막았던 것은 진압군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반란군인 [[김진영(군인)|김진영]] 당시 [[대령]]이었으며 실제 탱크 행렬을 저지한 곳 역시 행주대교가 아닌 광화문 부근이다. [[분류:한강의 교량]][[분류:39번 국도]][[분류:1978년 건설]][[분류:1995년 건설]][[분류:2000년 건설]][[분류:부실공사]][[분류:교량 사고]][[분류:나무위키 도로 프로젝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