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대첩 (문단 편집) == 결과 ==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유시(저녁 5시~7시)가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한양 방위를 위해 소수의 3천 조선군에 비해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일본군이었으나, 결국 큰 사상자를 내고 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모아 찢어버린 후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일본군에 대한 권율의 적개심이 폭발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근데 사실 권율 한 명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 민중들의 생각이 이랬을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 자식이나 부부끼리 잡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사람까지 잡아먹는 상황이 되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에는 싸움에서 이기고 일본군 시체를 전부 태워버린다. 뭐, 적군의 시체를 하나하나 예를 갖춰서 매장해줄 만큼 예쁘게 봐줬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을 가능성도 크다. 역병을 방지할 목적일지도 모르고.] 행주대첩에서 수적으로 10배 우세했음에도 패전했던 미츠나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병력은 1.5배 우세하고 공격조건도 좋았음에도 또 참패한 뒤 참수되었다. 반면 권율은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고 전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한성부판윤(현재의 서울특별시장)까지 이르렀으며 사후 충장(忠莊)라는 시호까지 받아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겼다. 말 그대로 [[단두대 매치]]였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