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대첩 (문단 편집) == 영향 ==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나흘 뒤인 2월 16일 권율은 [[파주]] 산성으로 군세를 옮겨 정세를 관망하게 된다.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약 2달간의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소강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에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일련의 접촉이 오고갔고 일본군 전군이 한성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산 등지로 철수하는 대신 철수하는 과정에서는 연합군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조선군은 단독으로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요격을 시도하였으며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해 혈전을 벌여 자신도 괴멸적인 심각한 피해를 입어가며 1차 진주성에서의 참패에 대한 복수를 하는 등 서로간에 이 합의를 지키지 아니하였다.] 결국 4월 18일 [[한양|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양|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이때 도원수가 되었기에 권율은 훗날 나라망신을 시킨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릴 수 있었다.] 일본군은 이 패전을 뼈아프게 여긴 모양이다. 우병사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신이 만나서 대화를 했을 때 행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1018_002|실록]] >병사가 '당신들이 경성에 있을 때 대패한 곳이 있는데, 그때 왜인이 죽은 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왜사가 '과연 경성 서쪽 20리 밖에서 접전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전사자가 4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기에, 병사가 '왜 4백 명이라 말하는가? 당신들이 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자를 주워 벤 것도 오히려 4백~5백이 넘고 불에 탄 뼈도 산처럼 쌓였었는데 어찌 4백여 인일 뿐이겠느냐?' 하자, 왜사가 웃으며 '전사자가 과연 많았고 부상자도 많았다. 그 당시 제장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각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서로 맹세하고 기필코 다시 싸워 보복하려고 근처에 있는 왜병 10여만 명을 불러 모아서 날을 택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조선 장수가 파주(坡州)로 진을 옮겨버렸다. 파주 산성은 공략하기가 행주 산성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행군하다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하니, 병사가 '파주에 진치고 있는 군사도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당신들의 10만 병력으로 무엇 때문에 중도에서 파하고 돌아갔느냐?' 하니, 왜사가 '행주는 진 밖에 암석이 간간히 있어 위에서 돌을 굴리면 바위 사이에 피신하여 혹 죽음을 면한 경우도 있었지만, 파주의 진은 돌을 피할 곳이 조금도 없어서 이것이 염려되어 결국 싸우지 못하였던 것이다. 조선 장수가 높은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를 많이 쌓아 놓는다면 우리 군사는 가까이 다가갈 리가 만무하다.' 하였답니다. 이와 같이 일본군 장수들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복수를 맹세할 정도였으나 결국 반격은 어불성설이고[* 그 와중에 10만 명을 모아서 공격할 거라는 허세도 떤다. 실제로는 10만은 황당한 과장이고 한양 주둔군의 병력도 태반이 부상병이었다. 당장 한성 인근 양주, 파주, 양천, 금천 등이 죄다 조선군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3군이 기껏 확보했던 청주성마저 조선군에게 수복되어 한성의 일본군은 [[영남대로]]를 통한 육로보급으로 간신히 연명하던 상황이었는데 이조차도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군 및 의병의 준동으로 위태로웠다.] 한양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결국 한양을 버리고 퇴각했다. 여러모로 행주 대첩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는 이야기. 이 전투가 일본 전국시대 최대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영향을 끼쳤으리란 추측도 있다. 서군의 핵심인물들 다수가 행주대첩에 참전했었는데, 이때의 패배로 인해 리더십이 상당히 깎여서 서군의 결집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같이 지휘했던 [[이시다 미츠나리]]도 병법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고 결국에는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쓴맛을 보았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행주대첩 승전에서 따온 승전로가 있었고 권율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에서 따온 충장로, 권율 장군의 이름을 딴 '''권율대로'''라는 [[도로명주소|도로명]]이 있다. 승전로는 2011년 도로명 개편에 따라 [[중앙로(고양)|중앙로]]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권율의 명성을 크게 높인 대첩이지만, 정작 권율 본인은 생전에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를 더 높이 평가했다([[이항복]]의 백사집 출처). 이치 전투 문서에 해당 내용이 나와 있다. 요약하면 권율 본인이 생각하기엔 오히려 이치 전투가 더 어려운 싸움이었음에도 행주전투에 비해 공이 덜 드러났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