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대첩 (문단 편집) == 오해 == || [[파일:external/file.dailian.co.kr/news1248760945_165501_1_m.jpg|width=300]] || || 본문 최상단 기록화의 부분도 || 대중적 명성에 비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많은 대표적인 전투가 행주대첩이다. [[행주산성]]은 그동안 석성이 아닌 토축산성으로 알려졌으나, 2017년에 석성의 일부가 발견되었고, 2019년 말의 발굴 결과 실제로는 삼국시대에 지어진 석축산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http://m.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84#_enliple|#]] 또한 한양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돌로 적을 때리는 처참한 전투를 펼쳤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선군 정규군에 소수의 승병이 합세한 정규군 간의 공방전이었다. 당시 [[행주산성]] 주변에는 민가도 없었으며 워낙 급작스럽게 촉발된 전투라 야사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전투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행주산성은 입구가 좁아 대규모 병력이 한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하며 심지어 일대가 습지로 진격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한강과 한강의 지류가 합쳐지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지형 자체가 [[호리병]] 모양의 [[배수진]]이 된다. 대략 일본군이 북방과 서방에서 돌아서 침공했고 동쪽과 남쪽이 한강으로 막혀있었다.[* [[파일:NxI6xGa.jpg]]] [[행주치마]]가 행주산성에서 백성들이 돌을 모으기 위해 입은 치마라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주장은 행주라는 지명에서 상상으로 나온 순전한 낭설이다. 행주 대첩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인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와 1527년에 지어진 [[훈몽자회]]에 이미 행주치마란 단어가 사용된다. 그러나 [[고양시]]에선 해당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으나 고치거나 알릴 의향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