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향신료 (문단 편집) ==== 유행의 원인 ==== 흔히 고기의 썩은 내를 방지하기 위해 향신료가 유행했다는 말이 나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중세 유럽 귀족층은 식품 위생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였고,[* [[동로마 제국]]은 식품 부정에 민감해서 10세기 초에 완성된 바실리카 법전에 관련한 내용이 실려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 상한 고기를 팔거나 빵의 무게를 속이거나 향신료를 거래할 때 먼지나 흙을 섞는 행위를 저지른 악덕상인들을 그의 가게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향신료 자체가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기 때문에 단순히 유통기한을 늘리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당시 기준으로는 유통기한을 늘리려고 향신료를 사느니 그냥 소금이나 꿀로 절이거나 차라리 그 돈으로 새 고기를 더 사는 쪽이 훨씬 이득이다. 겨울을 앞두고 최소한의 가축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도살한 후 고기를 소금에 절여놓고 먹었고 그 때문에 향신료를 뿌려 풍미를 좋게했다는 낭설도 돌지만, 냉장 기술 발달 이전 대부분 세계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냥 고기 먹을 일 있을 때 그때그때 동물을 잡는 것이었다. 13세기경부터 건초와 축사를 만드는 기술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겨울이라고 가축이 몰살당할 일은 없었다. [[중앙아시아]] 같이 겨울이 혹독한 지역이면 모를까. 또한 중세시대에는 살아 있는 가축을 도시 안에 위치한 푸줏간까지 데려와서 도축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날 도축된 고기는 바로 [[도시]]에서 소비되었다. 또한 과거부터 방부제로 주로 사용된 것은 [[꿀]]이었다. 게다가 고기를 소금에 절여 숙성 혹은 발효하는 유럽 음식들, 예컨대 [[하몬]]이나 [[살라미]] 같은 음식들은 원래 향신료를 쓰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향과 맛은 발효로 저절로 형성되니 소금만 있으면 되는 저장 식품까지 비싼 향신료를 쓸 리가 없다. 재료가 싸지고 풍부해진 요즘의 [[소시지]]나 육류가공품에는 여러 가지 향신료가 들어간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향신료가 방부제라기보다는 당시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설탕은 또 후추와 마찬가지로 고급 조미료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모습으로 왕이나 귀족이 참석하는 자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설탕]] 장식이 오늘날 웨딩케이크의 기원이 됐다. 설탕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세 유럽으로 널리 전파됐다. 존스홉킨스대학 시드니 민츠 교수(인류학과)는 '설탕과 권력'에서 “영국의 헨리 3세는 1226년 윈체스터 시장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산 설탕 3파운드(1.4㎏)를 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에드워드 1세 재위 시절인 1288년에는 왕실의 설탕 소비가 6258파운드(2800㎏)에 이를 정도로 소비가 급증했다”고 적었다. 이집트의 술탄은 1040년 라마단 기간에 7만3300㎏의 설탕을 썼다. '''설탕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 >『설탕의 고향은 뉴기니, 이슬람 거쳐 유럽으로』 中 특히나 귀족의 사치가 극에 달했을 시기엔 주객이 전도되어, 음식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향신료를 쓰는 게 아니라, 그 비싼 향신료를 이 만큼이나 쓴다는 걸 [[돈지랄|'''자랑하기 위해''' 맛이고 뭐고 없이 그저 무작정 향신료를 마구마구 뿌려대기도 했다.]] 거의 카레 수준에 가까웠으며 잠시 귀족들의 식탁이 남아시아와 비슷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중세 요리들이 맛도 없이 향신료만 들이부었다는 주장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원은 중세 요리책을 통해 실제로 음식들을 복원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정확한 양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계량화 이전의 한식조리법처럼 간장 약간, 마늘 좀 많이, 소금 한움큼,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오히려 아랍이나 터키, 인도의 요리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음식은 육류 위주의 식사가 주가 된다거나 빵을 그릇 겸 식기로 쓴다거나 하는 점에서 중세 시대의 식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언뜻 보면 향신료 사용량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지만 맛있는 요리들이다. 그것과 별개로 당시 식문화에 [[허세]]나 [[돈지랄|과시]]가 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도 고급 요리에 그러듯이.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신선한 고기가 오면 양념 안 하고 소금으로 구워먹는 게 당연시되지만, 조선시대에만 해도 이런 양념 없는 구이는 [[방자]]구이라 하여 하인들이 어쩌다 고기 얻을 때 급하게 구워먹는 요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 시대의 책에서도 아주 신선한 고기라면 양념 없이 소금간만으로 구워먹어도 맛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지금이야 쉽게 구하는 [[간장]], [[설탕]], [[꿀]], [[후추]] 같은 것은 지금보다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니 그런 것으로 양념하는 고기를 더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서양에서도 향신료를 통한 자극적인 맛을 결코 못 먹는 게 아니며,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다만 고추와 같은 잘 안 쓰는 향신료의 매운 맛,[* 실제로 카옌페퍼(cayenne pepper) 같은 고추는 유럽 요리에서 은근히 자주 쓰인다. 후추처럼 재료맛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들어갈 뿐.] 날파나 날 마늘의 아리고 매운 맛은 서양인들에게 제대로 적응이 안 됐을 뿐이고, 김장 같은 걸 할 때도 고추, 마늘을 팍팍 치는 한국과 달리 육류 위주로 향신료를 치며, 주로 익은 요리에 향신료를 치기 때문에 이런 편견이 생긴 것. 사실 서양 요리가 지금처럼 느끼해진 것은 의외로 근세 이후의 일이다. 일본의 연구가 하네다 마사시가 쓴 책인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향신료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하나의 건강기능식품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모든 사물은 건습한열의 네 가지 기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체액설]]을 신봉해서 몸에 병이 나는 것은 이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건강하고 오래 살려면 그 당시 기준으로는 건습한열에 맞추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중세 유럽에서 모든 고기는 찬 성질을 지닌 음식이었고 그와 반대로 향신료는 모두 더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찬 음식인 고기에 더운 기운을 가진 향신료를 뿌리면 밸런스가 맞게 되는 것. 또한 이 시대에는 오염된 공기로 병이 전염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독기를 몰아낸다고 생각되는 향신료들이 더욱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계피]]나 [[생강]] 등 특유의 향이 강한 향신료들은 방향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연히 효과는 미미했다. 이런 중세 유럽인들의 생각이 근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변화하게 되었고 이 시점에서 향신료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이 하네다 마사시의 설명이다. 이건 딱히 중세의 이야기만도 아니라서, 병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근현대에 와서 이야기이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에 전해진 담배가 만병통치약 취급을 받기도 했고, 이게 [[동양]]으로 전해지면서 [[한의학]] 서적에 담배가 역시 [[만병통치약]]처럼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1970년대에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태반은 [[기생충]] 감염이었는데, 구충제 대신에 [[담배]]를 입에 물렸던 것이 [[한국]]의 모습이었다.[* 니코틴에는 살충 효과가 있어서, 뱃 속의 기생충을 죽이거나 기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담배연기는 단순히 폐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이 식도로 넘어간 담배연기 속의 니코틴이 미약하게나마 살충 작용을 한다. ] [[중세]]에 [[전염병]]이 돌 때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역병 의사]]들이 새 부리가 달린 가면을 쓰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부리 부분에 향신료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