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가이 (문단 편집) == 생애 ==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출신설도 있다.]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슈켄트]]주의 주당(州黨) 비서로 근무하다 [[1945년]] [[8.15 광복]] 후 12월에 스탈린의 지시로 [[방학세]], [[박의완]], [[김열(1918)|김열]], [[김찬(1905)|김찬]] [[강상호]], [[기석복]], [[김승화]] 등과 함께 당과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1946년]] [[8월]] [[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 참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의 정권 수립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신설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6월]] 당의 제2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당 비서에 선출되면다. 이렇듯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기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이며 비서실장을 지낸 문일의 증언에 따르면 허가이는 한국말도 거의 제대로 할 줄 몰랐다고 하며 이 때문에 얼마 안되는 당내의 실무경험자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조선로동당]] 제1비서를 거쳐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대중정당론에 맞서서 전위정당론을 내세우면서 당을 개편할 것을 주장하다가 [[박창옥]], [[박영빈(1907)|박영빈]], [[박금철]], [[박정애]] 등 김일성을 옹호하는 4박가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조직부장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제1비서에서 해임, 11월 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으로 좌천당한다. 평소 [[김일성]]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박헌영]], [[리강국]] 등을 비롯한 [[남로당]] 일파에 대해 누명을 씌워 숙청이 벌어질때 허가이는 이들이 [[미국]]과 교신하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1953년 6월 30일 정치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김일성과 박창옥은 허가이를 맹렬하게 규탄하였으며, 그의 실수로 인해 저수지 복구 계획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가 당 비서와 당 부위원장에서 해임되게 만든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마구 비난하였다. 허가이는 자신이 일을 소홀이 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였으나 그외의 비난은 김일성과 박창옥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미워해서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허가이를 부수상에서도 해임하여 대외경제상으로 좌천하는 안을 제기하였으며, 허가이는 소련 대사관을 찾아서 하소연하였으나 소련 측은 그냥 김일성에게 싹싹 빌라고만 했다. 결국 이틀 후인 [[1953년]] [[7월 2일]]에 자신의 사무실인 평양의 지하 방공호에서 권총자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김일성은 [[박정애]]를 시켜 허가이의 자살을 맹비난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그가 죽은 후 허가이의 가족이 반발하자 김일성은 소련 공민이었던 이들을 껄끄럽게 여겨 소련 측에 부탁하여 허가이의 장인 최 표트르외 아내 최 니나를 비롯한 가족들을 소련으로 귀국시켰다. 아들인 허 이고르는 [[모스크바]]에 거주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