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가이 (문단 편집) == 의혹 == * 공식 사인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암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당시 [[권총]]을 2개나 갖고 있으면서도 가슴에 [[소총|장총]]을 맞은 자세로 죽었다든가, 죽기 몇 시간 전 장인이자 [[조선인민군]] 탱크부대장이던 최표덕과의 대화에서 조금도 자살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허가이의 딸 허리라는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장학봉은 당시 허가이가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암살된 것이라고 했으며 [[모스크바]]에 거주 중인 아들 역시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암살을 주장하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50020910601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8-15&officeId=00020&pageNo=6&printNo=22939&publishType=00010|#]] 그는 [[소련]]파의 수장이기에 소련[[대사관]]을 들락날락하는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부수상이자 외무상이었던 [[박헌영]]과 공무가 겹쳐서 계속 만나는 돈독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하려고 할 때 박헌영을 변호하려고 나선 허가이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이자 제거 대상 1호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는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김일성이었는데 그 이유는 [[6.25 전쟁]] 실패의 원인을 남로당에게 뒤집어 씌우는 작업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파의 수장인 허가이가 반대하면 일이 다 틀어지는데 그는 죽기 직전까지 소련 [[시민권]]자였으며 그가 자살하지 않고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국제적 분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는 자살할 정도의 정신상태는 전혀 아니었답니다. 가족에게 전할 유언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 자살할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외조부는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다만 아버지는 외조부에게 "김일성 동지는 '''내가 자기의 일거 일동을 [[소련공산당|모스크바]]에 보고하고 있다고 오해해''' 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오해는 쉽게 풀릴 것이다. 지금 조국에는 [[대숙청|37년도를]] 생각게 하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는 김일성 동지를 너무 치켜세워 그를 조선의 [[스탈린]]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고치지 않으면 인민들의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께서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차례 나를 소환해주도록 모스크바에 요청했다. 조국에서 나의 사명은 거의 끝났다. 오직 [[아첨]]분자들이 분별없이 날뛰고 있음이 걱정될 뿐이다.” 고 말했답니다. (친딸의 증언)[* 출처: 강상호 '내가 치른 북한 숙청'] * 허가이의 죽음에 대하여 다른 증언도 있다. 1951년 [[박영빈(1907)|박영빈]](소련파, 전 로동당 조직부장 겸 정치위원)은 허가이 암살설을 일축했으며 3가지 이유 때문에 허가이는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1951년 당에서 비판당해 조직부장 직에서 해임당했다. 둘째로 순안저수지 복구 사업을 김일성으로부터 지시받고 책임자가 되었는데 공사 현장에도 잘 나가지 않고 그 일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자연히 복구 사업이 지연되고 지원군도 동원되지 않는 상황에 최경덕이 현장에 직접 나가 확인 후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허가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오? 내가 보고받기로는 잘 안되는 것으로 듣고 있소"라며 비난했다. 이에 허가이는 "잘못 보고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이 직접 순안저수지 복구 현장을 보고 즉각 당 회의를 열어 허가이를 힐난했다. 셋째로 [[여자]] 문제 폭로였다. 소련파 간부들이 당시 연회장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을 초청해다가 술자리를 가졌는데 연회 후에 연회장 앞에 있던 저수지에 [[배우]] 하나가 죽으려 하는 것을 경비병이 목격했다. 그 배우는 "내가 [[유부녀]]인데 허가이 동무가 나를 욕보이려 한다"고 했다 한다. 이 사실이 당에 보고돼 허가이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는 것. >허가이는 유서를 써 놓고 죽었다. 내가 직접 보았고, 허가이 필체가 틀림없었다. 유서 내용은 간단했고 그 중 "김일성이 독일 방문 때 나에게 선물로 준 권총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가이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출처: 정창현 '인물로본 북한현대사'] 하지만 박영빈이 허가이가 몰락하면서 그의 자리를 차지한 수혜자였고, 숙청당해서 소련으로 돌아간 고려인들 중에서도 김일성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자기 미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