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무주의 (문단 편집) == 역사 == 허무주의는 근대 [[회의주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이전까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어졌던 것들(예를 들어 [[절대왕정]], [[중상주의]]적 통제 경제, 신분 제도, '기적'과 숭배에 의해 유지되던 지역 사회의 문화)은 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그 결과 18~19세기 유럽에서는 절대성과 [[신]]에 대한 믿음이 점차 퇴조했다. 또한 [[과학]]적 탐구를 통한 [[합리주의]] 사조에 의해 신의 자리는 점차 좁아져 [[이신론]], [[무신론]]에게까지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 사상을 내세우면서 [[귀납법]]의 한계를 분명히 제시하였기 때문에 [[경험론]]의 한계성 또한 대두되었고, 이로 인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현상 탐구 또한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니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철학자들에게 믿을 구석이 남아 있었다. 합리주의 철학자들과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들은 이성에 의한 연역적 추론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인간의 이성을 신과 등치시켰다.[*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구는, '생각은 존재한다' →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 '절대적으로 옳은 명제가 존재할 수 있다' → '절대적으로 옳은 신이라는 존재도 있을 수 있다' → '신이 보증하는 이성적 영역에서의 탐구가 가능하다' → 는 식으로 자신의 논증을 확장시켜 나간다. 데카르트 본인과는 관련이 없지만, [[이신론]]이 말하는 지점도 얼마만큼은 이와 닮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은 간혹 이것을 '국가'와 같은 경험적 현상 세계의 문제에 투영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들어서면, 이러한 합리주의에 대해서도 금을 가게 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경험 세계에 사는 존재라면, 경험 세계가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이상, 이성을 사용해 파악한 세계관 또한 절대적일 수 없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한 것이라면, 인간의 이성보다 완전한 것을 인간의 주관적 합리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결국 19세기를 거치면서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조차 사그라졌고, 이러한 사고는 [[중세]]의 절대신과 [[합리주의]] 사조가 추구하던 절대 진리가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상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의존할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가 확산되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 등이 근대 허무주의의 구도를 잡았다. 니체는 투르게네프의 허무주의 관념을 본격적으로 철학에 도입하여 방향을 상실한 유럽 세계의 단상을 지적하였다. 산업화와 잦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열악한 유럽 사회의 시대상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허무주의는 때때로 혁명적(또는 더 열악한 경우, 단순히 파괴적인) 사고 방식으로도 이어졌다(이후 시대에서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서는 아래 '정치사상으로서의 허무주의' 단락으로). 철학적으로는 19세기의 현실이 합리성의 결과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실제로 19세기의 국가는 그 반대편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 이전부터 이어진 권위주의와 사회적 차별, 수단화된 종교 등이 혼재되어 이성적 사고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는 [[혼종]]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가장 싫어했던 철학적 상대가 이런 사고의 정점에 있었던 헤겔이었다. 허무주의적인 현실 비판론은 일각에서 [[염세주의]]로도 이어졌으며, 대중적으로는 이러한 시각이 많이 퍼져 있다. 그러나 니체를 위시한 철학자들은 그러한 시각을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하면서, 허무주의 사상을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거나 추구할 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가진 삶의 생동감을 일깨워야 한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실존주의]] 사조로 발전시켰다. 즉, 근대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삶은 인간 바깥의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능동적 허무주의'). 따라서 철학사에서 허무주의는 절대성의 해체를 통한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크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향락주의자도 넓게 보면 허무주의자에 속한다. 향락주의자는 진리, 선, 질서 등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기껏해야 쾌락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만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 종말의 인간도 '세상 왜 이따구냐.'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다.'라고 말한다.이러한 허무주의가 바람직한 것인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허무주의자이면 무조건 염세주의자인 건 아니며, 허무주의는 현대에 생각보다 훨씬 넓게 퍼져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