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베이성 (문단 편집) == 역사 == [[기주]] + [[유주(중국)|유주]]. 고대부터 평야지대를 바탕으로 [[관중]]([[산시성(섬서성)|산시성]])-[[중원]]([[허난성]]) 등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운 동네였다. 이 때문에 하북을 근거지로 삼았던 [[원소(삼국지)|원소]]는 군웅할거 초창기에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고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 역시 관중-중원과 더불어 이곳에서 나오는 국력을 바탕으로 촉과 오를 압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북방의 수렵, 유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 역시 수도권을 화북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정치 중심지가 점차 황하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부터는 지금의 베이징 지방이 '계'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 [[연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게 다수설의 견해이다. 이후 [[전한]]대에는 '[[유주(중국)|유주]]'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그 이름으로도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후한 말에 [[유비]], [[관우]], [[장비]]가 그 유명한 도원결의를 맺은 곳도 지금의 이 지역이다. 또한 [[조운]]의 출생지도 허베이 성 쪽인 상산 진정이다. 조운이나 장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 고향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허베이 지역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이곳에 [[전연]], [[후연]] 등의 나라들이 들어선다. 이후 [[수나라]], [[당(통일왕조)]] 시대에는 한족의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변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북쪽인 점도 있고, 타 민족의 침입이 상당히 잦았던지라(...) 5대 10국 시대의 마지막에 이 지역을 [[연운 16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게 뺏긴 것으로 또한 유명하다. 이후 통일 왕조인 ~~글로벌호구~~ [[북송]]이 몇 번이고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송의 떨어지는 군사력으로는 거란(요)을 [[에어맨이 쓰러지지 않아|쓰러뜨릴 수가 없었다]].~~요나라가 쓰러지지 않아~~ 그래서 [[여진족]]([[금나라|금]])과 연합해 거란을 뭉개고 이 지역을 탈환했으나 곧바로 금에게 뒷통수를 털리고 이번엔 화북 전체를 먹혀버린다(...). 그리고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마침내 이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명나라]][* 명의 초기 수도는 금릉(지금의 난징)이었으나 3대 황제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뒤 명의 수도가 된다.]와 [[청나라]] 역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에는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인 [[직예성|즈리성]](直隸省)이라고 불렀고,[* 구체적으로는 명 초기에 수도였던 난징 주변을 직례라 하였다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지금의 허베이성에 북직례를 설치하고 기존의 직례를 남직례라 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들어선 후 북직례를 직례성으로 개편하고, 남직례를 강남성으로 개편했다가 강남성을 [[장쑤성]]과 [[안후이성]]으로 나누었다.] [[중화민국]]이 된 뒤에도 [[북양정부]]의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예성으로 불리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1928년 6월 국민정부가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의 [[군벌]]은 [[직예군벌]]로 불렸다. 1914년에 기존 순천부가 경조지방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에 순천부 관할이었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허(寧河)의 4개 현을 넘겨받았다. 또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몽골 지역에 차하얼 특별행정구와 러허 특별행정구가 설치되면서 이들 특별행정구[* 이후 이들은 1928년에 국민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차하얼성과 [[러허성]]으로 각각 개편된다. 이듬해에는 내몽골 서부에 닝샤성과 쑤이위안성이 신설되어 내몽골 지역의 행정구역이 새북 4성(요새(만리장성)북쪽에 있는 4개 성을 의미)으로 완전히 정비되었다.]에 북부 지역을 내주어 면적이 축소되었다. 1928년에는 경조지방이 폐지되어 그 중심 시가지만이 베이핑시로 남으면서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현들을 넘겨받았다. 1933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았고 [[하북 사건]]을 구실로 1935년 6월 10일, [[하매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거듭나면서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항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점령지로 8년을 점령당했고 [[신멸작전]]이 벌어져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곳이다. 이 학살로 당시 세를 불리며 거대해지던 팔로군의 기세가 꺾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다시 베이징에 두었지만, 다시 즈리성으로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 또한 중화민국 말기 허베이성 정부는 베이핑시에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바오딩시]]에 허베이성 인민정부를 설치하면서 바오딩시로 성도가 옮겨졌다. 이후 베이징시 주변 상당 지역이 베이징시에 편입되고,[* 다만 이 지역들은 베이징과 무관한 지역은 아니고, 모두 청대 순천부 및 북양정부 시기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현재의 베이징시 영역은 순천부와 경조지방의 영역보다는 좁다.] 차하얼성과 러허성이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폐지되면서 그 남부 지역을 다시 편입했으며, 1958년에는 [[톈진시]]를 재편입하여 톈진시로 성정부를 이전하였다. 톈진시가 1967년에 다시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다시 바오딩시를 성도로 삼았으나, 당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바오딩시가 성도 기능을 할 수 없어 이듬해에 [[스자좡시|스자좡]]으로 다시 성정부를 이전하여 현재까지 스자좡을 성도로 삼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