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샹닝 (문단 편집) === [[국공합작]]과 여성해방운동 ===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용공,노농부조의 신삼민주의 정책이 발표됨으로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쑨원을 지지하던 허샹닝은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4년 8월 국민당중앙 3대 부녀부 부장[* 3대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허샹닝이 고려되었던 것은 아니고 1대와 2대 부장이 개인적 사유로 사임하면서 허샹닝이 선택된 것이다. 허샹닝 또한 부녀부의 자리에 지원한 바는 없다.] 겸 국민당 광동성 당부 부녀부장에 취임하여 드디어 본격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허샹닝이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우선시했는가 아니면 혁명활동을 중시하면서 여성해방운동도 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허샹닝 본인의 저작, 회고나 국민혁명 이전까지 가정주부 활동을 더 많이 했던 것을 보아 전반적으로 국민혁명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허샹닝은 부녀부 부장에 취임한 후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3.8 국제 부녀절 행사를 크게 개최함으로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고 부녀지성이란 잡지를 창간하였다. 훗날 [[저우언라이]]의 아내가 되는 덩잉차오가 주필을 맡아 1925년 12월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극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부녀운동과 국민혁명을 여성들에게 선전하였고 국민당원의 가족들을 집회에 참석시켜 강연을 하게 함으로 삼민주의와 5권 헌법의 의의를 알렸다. 이러한 선전활동 외의 활동으로 해외의 화교들의 지원으로 빈민산부인과의원을 설립함으로 가난한 산모들을 지원했고 부녀학교, 합작사 등을 건설하여 복리사업에도 나섰다. 또한 부녀노동학교를 만들어 여공들을 교육시켜 그들의 학업과 인권 향상을 지원했고 광저우여자미술연구소, 광저우여자제작품판매합작사, 국민당구호소, 여공보습학교 설립에 나섰다. 허샹닝은 국민당 내부에서도 여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는데 신해혁명 이후 참정권을 요구하는 의회 난입 사건이 일어나는 등 여성해방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혁명정당인 국민당에서조차 남성우선적인 구시대적 사고는 완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았다. 여성집행위원들이 발기한 남녀평등원칙은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국민당은 그 시기까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허샹닝은 2.8 부녀절 기념대회를 통해 남녀평등, 각 기관의 여성 고용, 혼인의 자유, 재혼을 백안시하지 말 것 등의 구호를 제창했고 법률상, 경제상, 교육상, 사회상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인하여 여권의 발전을 돕자는 것을 강조했다. 이 활동 덕분에 남녀평등원칙이 국민당 내부에서 통과될 수 있었다. 또한 광동성에서 조직된 여러 여성단체들의 단결과 여성운동 통일성을 위해 여러 결합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5년 10월 혁명전쟁의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국인가속부녀구호보습소, 1926년 9월 광저우에서 국민당 중앙부녀운동강습소를 창립하여 부녀운동요원을 교육하였다. 허샹닝은 이 과정에서 국민당에 합류한 공산당원들과 적극 교류, 협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