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정(삼국지) (문단 편집) == 생애 == 본래 여남 태수 유익(劉翊)의 천거로 효렴에 등용되었고 상서랑으로 임명되어 관리 선발을 맡았다. 영제가 죽은 후 [[동탁]]이 [[하진]] 사후 낙양에 입성하면서 주비를 이부상서(吏部尙書), 오경 등과 함께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동탁에게 각지의 태수를 추천하였는데 동탁은 그들의 추천에 따라 [[한복(삼국지)|한복]]을 기주목으로, [[유대(삼국지)|유대]]를 연주자사로, [[공주(삼국지)|공주]]를 예주자사로, [[장막(삼국지)|장막]]을 진류태수로 삼았다. 허정 자신은 파군태수가 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보좌하였다. 이 태수들이 죄다 [[18로 제후|동탁에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동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훌륭한 선비를 발탁하여 등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여러분들의 건의에 따라서 천하의 인심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임용 한 사람들은 취임하는 날 돌아와 나를 공격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의지하겠습니까!"] 주비, 오경은 처형되고 진국상을 맡고 있던 허정의 사촌형 허탕(許湯)도 예주자사 공주와 협력하고 있었으므로 허정도 처형당할까 두려워 자신이 추천했던 예주자사 [[공주(삼국지)|공주]]에게로 몸을 피했다. 이후 공주가 죽자 양주로, 양주에서 다시 회계 태수 [[왕랑#s-1]]에게로 옮겨가는 험난한 여정을 겪었는데 이때 [[원술]]의 밑에 있던 [[손책]]이 회계를 공략, 왕랑 등과 함께 바닷가로 몰려 [[캐스트 어웨이]](...)의 인생을 살게 된다. 바닷가를 떠돌다 정착한 곳이 교주였는데 교주는 바로 [[사섭]]이 다스리는 곳으로 중국의 최남단이었다. 도주할 당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머무르는 [[대인배]]적 행동을 보여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교주를 통치하고 있던 사섭의 예우를 받았다. 당시 사섭에게 몸을 의지했던 원휘는 순욱에게 허정의 인물됨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조조]]에게 탄원서를 보내 형주를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나 장상이라는 관리가 허정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는 청을 거절받은 바 있었으므로 편지를 버려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유장(삼국지)|유장]]이 사자를 보내어 청하자 따라가서 익주에서 일하게 되었다. 파군과 광한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211년, 촉군태수 왕상(王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가 되었다.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이때의 허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12년 9월 경술일(21일), 황자 유희를 제음왕(濟陰王), 유의를 산양왕(山陽王), 유막을 제북왕(濟北王), 유돈을 동해왕으로 세웠는데 당시 허정이 파군(巴郡)에 있었는데, 여러 왕들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필히 잠시 뻗게 해줘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거든 잠시 주어야 한다더니, 바로 맹덕(孟德, 조조)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리고 얼마 후 214년, [[유비]]가 [[익주]]에 입성하여 유장을 공략, 성도를 포위하자 성벽을 넘어 도주하여 투항하려다 잡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이라 죽지는 않았고 유비군이 입성하면서 구출되었는데 유비는 허정의 적전도주 행위를 두고 그를 기피하였으나 [[법정(삼국지)|법정]]이 말하길 '허정은 헛된 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이 그 명성에 미혹되므로 그의 명성을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하여 유비의 휘하로 들어오게 된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를 당시 허정은 진군장군(鎭軍將軍)을 맡고 있었으며,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에는 태부로 봉해졌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되었고, 촉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그릇된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221년 허정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함께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다. 222년, 죽었다. 아들 허흠(許欽)은 허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요절하였으며, 손자 허유(許游)는 경요 연간(年間)에 상서(尙書)가 되었다. 형의 외손자인 [[진지(삼국지)|진지]]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허정에게 의탁하자 받아들여 양육하였고, 후에 진지는 유선에게 깊이 신임과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다. 본격 험난한 인생을 산 인물로 그의 여정을 보노라면 거의 중국을 낙양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돈 셈이다. 거기다 심지어 지금의 [[베트남]]인 교주까지 훑은 셈이니 말 다했다. 말년에는 좀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조조나 유장 등이 그를 끌어쓰려고 한 것을 보면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또 당시 시대상 그리 까일 일도 아니고...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허정을 태부로 삼는데 이것은 [[미축]], [[제갈량]]보다 높은 직위였다. 그 뒤 유비가 [[황제]]가 되자 사도의 지위에 오르는데 승상인 제갈량의 바로 아래의 직위였다. 태부나 사도나 지위만 높고 실권은 적다는 걸 생각하면 명성을 고려하여 일종의 명예 벼슬을 준 셈이다. 참고로 촉은 허정이 사도에 임명된 것 이외에는 [[삼공]]을 임명한 적이 없다. 즉 허정은 촉의 유일한 삼공인 셈.[* 상관승이라는 사람이 태위라는 기록은 있으나 《신당서(新唐書)》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라는 후대 기록이라 진위여부는 불확실하다.] [[이릉대전]]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다. 대륙을 한바퀴 돌며 엄청나게 고생하는 독특한 행보를 걸었지만 말년에는 무난평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손미]]와 비견될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