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정(삼국지) (문단 편집) == 기타 == * [[화흠]], [[왕랑]], [[진군]]의 아버지인 진기, 원환 등과 친한 후덜덜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화흠, 왕랑, 진군은 위나라 건국 초년에 허정에 편지를 보내 우호관계가 두터움을 확인했다는데 내용이 길어 본전에는 전해지지 않고 위략에 왕랑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남아있다. 편지 내용은 회계에서 헤어지고 30여년이나 만나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 가정 사정, 위나라의 정통성 주장, 촉에 대한 평가, 위에 대한 귀순 권유 등 다양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왕랑의 가계 사정이 세세하게 적혀있는데 왕랑은 헤어진 이후 아들과 딸 한명을 잃었으며 아들 [[왕숙]]을 회계에서 낳았는데 29살이라 하고 그 다음 아들은 낳은지 1년여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지를 여러 통 보냈는데 [[유비]]가 죽고 [[유선(삼국지)]]이 즉위한걸로 적혀있고, 이전 편지에 대한 답장이 없어 다시 보낸다는 문구도 있는 것을 보면 왕랑이 보낸 편지를 받을 시점에 허정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 허정의 사촌동생은 '월단평'이라는 인물평가로 유명하고 [[조조]]의 인물평을 남긴 [[허소]]였다.[* 흔히 관상쟁이로 알려져 있으나, 허소나 허정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음식점에 평점을 매기듯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당시는 평판이라는 것이 지금보다 더 중요하였고, 주요 관직도 사실상 상속되거나 아니면 천거로 올라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삼국지의 초기 주요인물들이 모두 거치는 관직인 의랑과 효렴이 각각 의롭다거나 효자라거나 라는 식의 천거직이다. 그래서 그 평판을 얻는 것이 중요해졌고, 소위 명사들이 인물평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 정해졌다. 이때 가장 신뢰도가 높았던 것이 허소와 허정의 월단평이다. 이런 점을 알면 조조가 왜 평가 한 마디 들으려고 물고 늘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나마 조조는 평가에 목을 매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에 뭇사람의 인정을 많이 받지 못한 것 외에는 딱히 이렇다할 패널티가 없었으나 얼자 출신의 원소는 평판을 위해 '''6년상'''이라는 고행을 해내어야 했고 유비는 공융이 자기 이름 한번 언급해줬다고 기뻐했을 정도며 명사들의 특별한 평판도 없어서 썌빠지게 구르며 자기를 증명해야 했다.] 허정 또한 인물평으로 유명했으나, 사촌동생 허소와는 사이가 나빴고 그가 허정을 배척하여 출사하지 못하게 하고 봉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