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젠 (문단 편집) === 호남에서의 통치 === 1930년 [[리리싼]]의 주도로 [[중국 공산당]]이 [[창사 폭동]]을 일으키자 8월 5일 창사를 탈환한 이후 10월 24일 마오쩌둥의 아내인 [[양카이후이]]를 체포하여 남편과 의절할 것을 요구했지만 양카이후이가 듣지 않자 11월 14일에 처형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을 토벌하기 위해 휘하의 4로군을 지휘하여 [[초공작전]]에 나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회유를 동시에 받았는데 중앙 옹호를 통전하며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위해 중앙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고 [[허잉친]]의 3개 사단이 파견되어 초공작전을 돕게 되었다. 허젠은 '청당반공'의 구호를 내세워 호남성에서의 공산당 근절을 위해 대대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공산당원들의 자수를 독려하고 각지에 민단을 조직하여 공산당에게 맞서게 했다. 이에 토호열신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국민혁명 과정에서 도태되었던 구시대의 지방 세력가들이 복귀하여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무에 참여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931년 9월 3차 전성대표대회에서 호남성 집행위원 겸 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국민당에 등기하지 않은 당원들에게 등기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예비당원을 모집하는 등 적극적으로 당무활동을 전개하였다. [[천리푸]], [[천궈푸]]의 [[CC단]]에 대응하기 위해 도협이라 불리는 전국도로협회호남분회를 거점으로 허젠파라 불리는 독자적인 당내 세력을 육성하여 CC단과 경쟁했다. 이로 인하여 1933년 5차 전국대표 대회 대표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팽국균, 장형 등의 CC단 세력을 이기고 자신의 휘하 세력인 허젠파를 대표로 파견할 수 있었다. 이에 천리푸가 도협이 불법집단이라고 비판하였으나 1934년 4월 호남성 제4차 대표대회에서도 허젠파가 승리하면서 허젠은 다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국민정부는 계파 투쟁으로 각 성의 지방당무가 마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책임제에서 중앙특파원 제도로 개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