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헌 (문단 편집) === [[8.15 광복|광복]] 이후 === ||[[파일:단선 단정 반대투쟁 대책 보고하는 허헌.jpg|width=100%]]|| ||[[남북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 대책을 보고하는 허헌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1945년 [[8.15 광복]] 후 [[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허헌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가 이 내각에서 법무부장관이었던 것을 보면, 광복 당시 허헌의 위상이 김병로의 위상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1891)|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1889)|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1905)|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1905)|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 ||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1906)|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 ||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정치인)|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27|출처]]}}} || 이때 여운형, 박헌영과 손을 잡고 진보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고, [[미군정]]청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부인한 데다, 허헌 본인도 미군정과 제휴하였던 [[한국민주당]] 및 [[우익]]세력들의 공격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가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아래 자리인 내무부장을 배정 받은 것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자, 김구가 주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덧붙여서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들이 국제 사회 승인을 받았다면 미국이 무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헌이 김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은 1922년의 [[김립 피살 사건]]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허헌과 친분이 깊었던 [[김립(1880)|김립]]이 이때 김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암살을 당했던 것. 1946년 2월에는 조선공산당과 그 밖의 중요한 [[좌익]] 단체들이 모두 참여하여 조직된 이른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의 수석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12월 9일, 중앙위원회-중앙감찰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남로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결국 1948년에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47년 [[리승엽]]과 함께 [[북한]] 지역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김두봉]]에 이어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기도 했다. 1949년 6월,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당 이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17일, [[평안북도]]로 피난갔던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식에 참석하기 위해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청천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당시 폭격으로 부상당해서 감정제대하고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 이동하던 김현식이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허헌은 보트에 실린 자동차 안에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병사들을 시켜 허헌의 시신을 찾으라고 지시하였는데, [[허정숙]]의 회고에 따르면 서해 바다까지 떠내려가서 팅팅 불은 허헌의 시신을 겨우 수습했으나 시신조차 결국 못 찾아서 가매장을 해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전쟁 중임에도 국장이 거행되었고,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허헌의 몫이었던 정치위원 자리는 [[박정애]]가 승계했다. [[파일:/image/001/2011/05/13/PYH2011051311240001300_P2.jpg]] 김일성이 직접 관도 들었다. 사진 출처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61783|이곳]]. 만약 사고사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남로당계의 거물이었던만큼 [[6.25 전쟁]] 휴전 이후 남로당 숙청 때 숙청당했을 수도 있지만, 허헌은 일제강점기 민족 변호사로서의 명성도 갖고 있었던 인물이므로 숙청당하지 않고 남겨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홍명희 외에 [[백남운]], [[이극로]], [[박문규]] 등 월북한 인사들 중 숙청당하지 않은 인물들이 몇명 있기도 하고 사후에 북한에서 평가가 괜찮았다는건 김일성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 김일성이 [[허정숙]]을 고위직에 앉히면서 중용한 이유도 허헌을 존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을 변호해준적이 있기 때문에 [[만주파(북한)|만주파]]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허헌은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 주류였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명망 때문에 남로당 위원장 직을 맡았던 측면이 크다.[* 또한 김일성 회고록에 따르면 허헌은 박헌영을 싫어해서 김일성에게 박헌영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애국열사릉]]에 묻히고 자녀들도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는 등, 남로당계 인사 중 드물게 북한에서도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