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강왕 (문단 편집) == 생애 == [[헌안왕]](제47대)의 딸이자 경문왕의 왕비인 [[문의왕후]] 소생이다. [[당나라]]에서 경문왕을 책봉할 때 원자의 존재를 알고 원자에게 비단 40필, 옷 1벌, 은그릇 1개를 내린 것이 865년 4월인데 태자 책봉은 약 1~2세의 나이에 시행되므로 헌강왕 김정은 864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 번 눈으로 보면 모두 외웠다고 한다. 《[[삼국사기]]》 <[[http://hwalove.tistory.com/category/%EC%97%AD%EC%82%AC%EC%84%9C%EC%9E%A5(%E6%AD%B7%E5%8F%B2%E6%9B%B8%E7%AB%A0)/%EC%82%BC%EA%B5%AD%EC%82%AC%EA%B8%B0(%E4%B8%89%E5%9C%8B%E5%8F%B2%E8%A8%98)?page=6|헌강왕 본기]]> 에 따르면, > 어느날 왕은 월상루에 올라가 민가를 바라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묻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연기가 나지 않는)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 민공은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임금의 어진 덕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 왕은 이에 즐거워하며 "이는 여러 신하들의 도움 때문이지, 짐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나온 [[숯]]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실제로 민간이 사치를 부렸다는 설도 있고[* 이전 시점이지만 [[흥덕왕]](제42대) 시절에 [[골품]]에 따른 복식 구분을 시도한 기록을 보면 '평민 여성'은 '비단 치마 이하를 입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놓았다. [[비단]]이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소재는 아님을 감안하면 이 조치 이전에는 더 좋은 것을 입는 경우도 있었던 듯 하다.] 보편적인 해석인 신라 귀족들의 사치를 설명하는 구절이라는 설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숯의 사용을 통한 공기 청정을 고려한 조상들의 지혜라거나 지나친 숯을 만들기 위한 벌목에 따른 산림 파괴가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나름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숯이나 기와에 대한 비슷한 묘사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경주시|서라벌]]의 영화로움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악기)|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신라 수도인 서라벌 일대에만 한정되었던 것 아니냐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헌강왕이 승하하고 불과 5년 후인 진성여왕(제51대) 시기 지방에서 세금이 안 걷히기 시작해서 조정이 곤궁해졌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간단히 한 줄로 진압했다고 넘어가지만 재위 11년 기간 중 [[일길찬]] 신홍[* [[신덕왕]](제53대)의 외할아버지 박순홍과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된다.] 등의 반란도 있었다. 때문에 헌강왕 시기의 저 기록은 역사적 기록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는 예시로도 종종 쓰인다. [[회광반조|태평성대 직후 난세]]라는 점에서 보자면 [[현종(당)|당현종]]의 [[개원지치]]와도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처용가]]>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동쪽에서 모르는 네 명이 만나서 춤을 췄는데 산과 호수의 정령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전한다. <처용 전설>의 원형으로 보여지지만 동쪽이라는 말을 통해 [[울산광역시|울산]] 지역에서 무역을 하던 [[아라비아]] [[상인]]으로 판단해 처용 서역인설도 존재한다. 이는 국제교역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에서 나온 설이다. [[임용한]]의 대중 역사서 《한국고대전쟁사》에서는 이런 설들을 종합시켜 헌강왕이 아라비아 상인 세력과 교역 협정을 맺으면서 돈이 들어와 수도 서라벌 일대의 경제 상황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이 헌강왕 치세의 짧은 번영을 설명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헌강왕 재위기인 877년 신라 말 난세에 종지부를 찍는 인물인 [[태조(고려)|왕건]]이 [[개성시|송악]]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헌강왕보다 몇 살 아래인 신라 혈통 [[호족(한국사)|호족]] 자제 [[견훤]]이 지금으로 치면 고1 정도 나이에 신라 중앙군 병사로서 서라벌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헌강왕은 같은 장소에 있었던 자신 휘하의 풋풋한 말단 청소년 병사 견훤이 약 20년 후 신라 불구대천의 원수 [[백제]]를 부활시키고, 정확히 50년 후에는 서라벌을 초토화시켜 신라의 정상적인 [[수명]]을 끝장내면서 한 외손자는 죽이고 다른 외손자는 원치 않던 [[왕위]]에 강제로 끌어올릴 걸 예상하고 있었을까?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 견훤, 왕건이 서라벌에서 만났다는 개연성 없진 않은 창작을 했었는데, 실은 헌강왕과 견훤의 있었을법한 만남이 더 극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견훤은 백제 왕이 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신라 대장군의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던지라 훗날 스스로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885년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최치원]]이 헌강왕 치세에 귀국해서 자신이 당나라에서 썼던 《[[계원필경]]》을 비롯한 여러 책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886년 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인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고 말하면서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 는 열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여진족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뿐 아니라 북방의 [[발해]] 역시 이쯤 되면 내분 및 여러 요인으로 쇠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 때쯤 [[한반도]] 북부 [[함경도]] 지방은 발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실상 [[말갈]]-[[여진]] 계통의 독립 상태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886년 음력 6월부터 병이 들어 몸이 건강하지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기도 했으나 병이 심했던지 886년 음력 7월 5일 승하했다. 아버지 경문왕과 영화부인 김씨가 860년에 [[혼인]]했고 영화부인 김씨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보아 많아야 20대에 요절한 것이 명백해 보인다. 아들로 훗날 효공왕에 오르는 김요가 있었지만 서자라 일단 이 때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됐으며 동생 김황이 즉위했으니 [[정강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55에 있는 능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주시 [[시내버스]]가 많이 다니고 [[남산(경주)]]을 등산할 때도 기점으로 많이 가는 통일전에서 300m~400m 정도 거리에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면 가기는 쉬운데 가는 길에 주차장을 거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거쳐야 한다. 300m 거리에 동생이자 다음 왕인 [[정강왕릉]]도 있으며 양식이나 크기는 거의 똑같은데 정강왕릉이 비교적 초라한 편이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