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강왕 (문단 편집) == 주요 업적 == [[김헌창의 난]]과 장보고의 난 등을 거치면서 신라 왕실은 서라벌이 지방 반란 세력에게 위태로울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고, 그 결과 각 5소경의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서라벌 주변에 군사적 성격이 있는 부(府)들을 설치하여 만약의 경우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진압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최소한 [[진흥왕]] 이전 신라 영역이라도 지키고 서라벌도 방위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이 부(府)들의 설치가 완료된 것이 바로 이 헌강왕 때다. 이 부들은 차례차례 [[고려]]와 [[후백제]]에게 넘어가거나 저항하다 병탄되었지만, 그래도 무려 약 30년 동안은 신라를 위해 최후까지 기능했다.[* 다만 얄궂게도, 헌강왕 당시 완료한 이 부들을 훗날 최종적으로 파괴해서 끝장내게 되는 자는, 다름아닌 헌강왕 자신이 신라 중앙군 말단병사로 기용한 [[견훤]]이었다. 견훤이 이렇게 힘들여 수고하여 신라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죄다 무력화하지 않았다면, 그때도 그렇게 왕건이 신라 왕실을 상대로 당당한 갑질을 시전할 수 있었을진 영 미지수다. 헌강왕과 견훤의 얄궂은 인연의 또 다른 단면이라 하겠다.] 또한 6두품들에게도 자색 공복을 내려주며, 진골만 역임할 수 있었던 관직을 주기 시작한 게 헌강왕 때부터이다. 사실 헌강왕 이후에는 [[6두품]]과 진골 사이의 승진 차별은 거의 허물어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미 6두품들은 새로운 시대를 꿈꾼 지 오래되었고, 같은 조건이면 역시 진골한테 밀리는 건 당연했으니, 앞서 부의 설치 완료와 마찬가지로 점점 다가오는 종말을 약간 늦추는 정도의 효과 밖엔 없었다. 굳이 말하면 그 정도 해낸 것도 나름 큰 업적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