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성자열황후 (문단 편집) === 고종의 황후 === 1127년, 강왕 조구가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남송|송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나갔다]]. 바로 조송의 제10대 황제이자 남송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오씨는 고종을 따라 금나라에 쫓기는 상황을 계속 겪었다. 그러다가 금나라와의 강화협정이 겨우 체결되었다. 1142년 고종의 모후인 [[현인황후]]가 고종의 첫번째 황후였던 [[헌절황후]][* 형식상으로 그런 것이다. 당시 헌절황후는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인질로 붙잡혀있었기 때문이다.]가 1139년에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남송으로 돌아오면서, 중궁이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조정에서는 고종에게 대신들이 황후 책봉을 청하였고, 현인황후 역시 오씨를 추천하였다. 결국 1143년, 고종은 귀비였던 오씨를 황후로 정식 책봉하면서 오씨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고 더불어 1129년에 묘부와 유정언의 쿠데타로 강제 퇴위되었다가 복위하면서 유일한 아들인 원의태자 조부를 잃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오씨도 자식이 없었다. 게다가 태종의 후손들도 정강의 변으로 끌려가는 등 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고종은 종실 중에서 태조의 자손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태조의 차남인 조덕방의 6세손 조백종(趙伯琮)을 조신으로 개명시키고 양자로 삼았고, 조백구(趙伯玖)도 양자로 삼고 조거로 개명시켰다. 고종의 황후인 오씨는 고종의 양자들을 아끼며 자신의 자식들처럼 길렀고, 이 중 조신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는데, 조신이 바로 남송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조송의 제11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2대 황제인 효종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