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정왕후 (문단 편집) === [[고려사]] === [[사촌]] 형제인 [[경종(고려)|경종]]과 혼인하면서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성씨인 황보씨를 따랐다. 허나 경종이 일찍 붕어하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10대 중반에 사별했다.] [[만월대|본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의 자택에서 거처하였다. 혼자 살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고 높은 언덕에서 소변을 봤는데 소변이 나라에 넘쳐 은색 바다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꿈과 비슷한 부류의 스토리(?)는 많다. 가장 유명한 예는 [[김유신]]의 여동생들 중 언니 [[보희]]가 이와 비슷한 꿈을 꾸자 부끄러워 동생 문희에게 비단 치마 한 벌을 받고 팔아버렸는데 훗날 문희가 [[무열왕]]과의 사이에서 [[문무왕]]을 낳고 [[문명왕후]]가 된 것.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의 어머니도 이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헌정왕후가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니 "생자즉왕, 유일국(生子則王, 有一國.)",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는 왕이 되어 일국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 나왔다. 헌정왕후는 '난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가?' 하고 의심스러워 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종이 훙서하자 왕륜사 남쪽의 사제로 나가 살았는데 일찍이 꿈에 곡령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다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점을 쳐 보고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시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리라." 라고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거늘 어찌 아들을 낳겠소?" 라고 하였다. >----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그런데 태조와 제5비 [[신성왕후]]의 아들인 [[안종(고려)|안종 왕욱]] 역시 왕륜사 근처에 살아 서로 왕래하다가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었다.''' 현종이 99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난 걸 보아 두 사람이 눈이 맞은 건 대략 991년도 즈음으로 보인다. 결국 둘은 야합으로 임신부터 해버리는데 그 아기가 바로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詢), 훗날의 [[현종(고려)|현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는 바로 '''[[숙부]]와 [[조카]] 관계라는 것이다.''' 일단 인척관계를 자세히 보면 헌정왕후는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제4비 [[신정왕후]]의 아들인 [[대종(고려)|대종 왕욱]]과 [[선의왕후(고려)|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조 왕건의 친손녀이며 왕욱은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제5비 [[신성왕후]]의 아들로 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 왕욱의 이복 동생이니 헌정왕후는 왕욱의 조카딸이다.[* 참고로 헌정왕후의 어머니 [[선의왕후(고려)|선의왕후]]도 태조 왕건의 딸(제6비 [[정덕왕후]] 소생)이다. 헌정왕후의 부모인 대종과 선의왕후도 이복남매, 헌정왕후의 전남편인 [[경종(고려)|경종]]의 부모 [[광종(고려)|광종]]과 [[대목왕후]]도 이복남매다. 보면 알겠지만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아들들은 [[혜종(고려)|혜종]]과 [[정종(고려)|정종]]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다만 이복남매간의 근친혼도 당연시되던 고려 왕실의 당시 풍습으로 숙질간 혼인은 여차저차 융통성 있게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그냥 과부가 아니라 [[경종(고려)|선왕]]의 [[왕후]]였고 왕욱도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당시 고려 왕족의 혈통은 감소세를 보였는데 고려 초에 왕족들은 남아도는 왕자녀들의 해결하기 위해 이복남매, 숙부와 조카의 족내혼을 당연시했다. 적어도 두 사람의 관계가 현시대처럼 죄악이나 사회적 매장감은 아니었다는 것은 이렇게 가족 간에 태어난 사생아를 왕인 외삼촌이 보호하고 왕족으로 인정한 것, 부모 역시 사후 추존된 것 등으로 볼 때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였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전개. 비슷한 경우로 헌정왕후의 언니 [[천추태후]]도 [[김치양]]과 사통해 아들까지 낳고, 이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장남 [[목종(고려)|목종]]을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 다만 천추태후가 실각해 권력을 잃자 김치양은 아들과 함께 곧바로 처형당한다. 물론 천추태후의 실각만이 원인은 아니고 김치양은 왕족인 왕씨가 아니면서 [[역성혁명|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던]] 빼도박도 못하는 반역자라 그렇게 된 것이다. 과부인 태후, 왕후의 사통이 중죄였다면 출산조차 불가능했거나 사통한 남녀 모두 작살났겠지만 그런 거 없었다. (실제로 후대에 비슷한 사례는 적당히 벌을 받았지만)그러나 선왕의 왕후가 과부 상태에서 가까운 왕족과 사통해 신분이 높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다 둘의 관계를 왕에게 알리지 않아 왕을 속였다는 기군망상의 죄까지 걸고 넘어질 수 있었다.[* 거기다 넘겨주기엔 아들일 경우, 아이의 출신이 너무 높았다. 태조 왕건의 친손자이자 외증손자, 외할아버지는 왕건의 아들, 외할머니도 왕건의 딸, 친부도 왕건의 아들, 생모가 왕건의 손녀, 외손녀라는 어마무시한 극근친을 자랑한다. 부모보다 태조 왕건과 핏줄상으로 진하게 가깝다!] 결국 문제가 터진다. [[성종(고려)|성종]] 재위 11년(992년) 7월 1일 밤, 헌정왕후의 가인(家人)들이 소동을 피운 것이다. 당시 헌정왕후는 숙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가인들이(이렇게 계속 알면서 숨기다가 자기들도 같이 죽겠다 싶었던지) 마당에 짚을 모아 큰 불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의 임신을 왕에게 알려 김춘추와 결혼시키기 위해 벌였던 화형 쇼가 떠오르는 부분으로, 모시던 주인들의 관계를 공식화시켜 폭로든 처벌이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만약 주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었다면 집에 불을 질렀을 테니. 태조의 아들 집에 불이 났으니 온 조정이 난리가 나 불을 끄러 갔다. 성종까지 직접 출동했다가 한밤 중 그 집에 있는 여동생을 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들통나 버리고, 유교맨이었던 도덕군자 성종은 이에 빡쳐 스캔들을 일으킨 안종을 즉시 사수현[*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유배 보낸다. 고려사 성종 세가엔 992년 7월 임진일에 유배를 보냈다고 나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만삭 상태로 이 소란을 겪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아 "참한곡립(慚恨哭泣)", "화가 나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부분이 고려사에 적힌 유일한 헌정왕후의 심리묘사이다. 안종이 처벌을 받게 되어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들킨 게 부끄러웠는지 그도 아니면 고려사 서술자가 마음대로 상상해 적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뜻밖의 사태에 놀라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안종의 집이 왕후의 집과 더불어 서로 가까워 그로 말미암아 더불어 오가면서 정을 통하였는데 산달이 가까워 와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성종 11년(992) 7월,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머물자 그 집안사람들이 장작을 뜰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막 솟아오르자 백관이 불을 끄러 달려오고 성종도 급히 와 안부를 물으니, 집안사람들이 결국 사실대로 알렸으며 이에 안종을 유배보냈다. >----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쫓겨나는 안종과 이별하고 돌아오던 헌정왕후는 집 앞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다 사망한다. 고려사 후비 열전에서는 아이가 너무 빨리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 앞에서 낳고 바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이는 왕가의 성을 물려 받아 왕순(王詢)으로 명명되고 그래도 조카라고 성종이 신경을 써 유모에게 맡겨 도성인 개성에서 키웠다. 그 후 말을 시작한 아이가 성종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성종은 가엾게 생각해 사수현에 유배되어있던 아버지 [[안종(고려)|왕욱]]에게 아들을 보내 그가 죽을 때까지 몇 년간 부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