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제 (문단 편집) === 긍정적 === >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鼎, 왕업을 상징하는 세발 솥)이라는 기물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 >《후한서》<효헌제기> 헌제의 [[선양]]은 비교적 평화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이루어진 편인데, 이는 헌제의 생존에 근거한다. 이는 그가 조비보다 장수하였으며 자손 대대로 공작을 물려받아 생활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비가 칭제했을 때 헌제는 살아있었다.[* [[나관중]]도 이게 걸렸는지 [[유비]]의 칭제에 앞서 헌제를 죽여 버린다. 실제로도《촉서》<두미전>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224년 [[두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비]]가 헌제를 죽였다."고 알리는 구절이 있다.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었거나,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곡해했다는 말이 된다.] 선대 황제로서 일종의 예우를 받아 황제의 의관과 그 외 예식은 황제급으로 행하게 되었다. 또 위 황제에게 글을 올릴 때 "신(臣)"이란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유선(삼국지)|유선]]이나 [[조환]] 등이 선양 혹은 폐위되었지만 전 황족으로써 제대로 대우를 받고 산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또한 [[효헌황후 복씨|복황후]]와 [[헌제귀인 동씨|동귀인]] 역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조가 미쳐서 잡아 죽인 건 아니고, 본인 혹은 본인의 아버지가 조조 암살을 기도하다 발각되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죽은 것이다. 이에 대해 고대로부터 조비의 시대까지 선양한 황제가 살해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실존조차 불분명한 [[요순]]의 경우를 제외하면 '''[[고대]]로부터 [[조비]]의 시대까지 [[선양]]한 사례'''라고 해 봐야 전한 [[유자영]]과 왕망의 경우 하나, 그리고 굳이 추가하자면 연왕 쾌가 [[자지]]에게 선양한 사례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둘 다 살해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유자영은 선양할 당시 고작 4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방에 유폐되어 교육은커녕 대화조차 거의 못 하고 바보처럼 살았다. 쾌의 경우에는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역시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큰 의미는 없지만 [[요]]의 경우에도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죽서기년]]에 전한다. 헌제처럼 제대로 대우를 받은 전례는 없었다. 물론 동승, 복완의 조조 암살 기도 등으로 헌제가 조위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220년 10월 28일] 선양[* 같은 해인 220년]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은 헌제의 자의적이고 적법한 절차를 거친 듯 꾸며놨을 뿐, 실제로는 강제성을 띠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왕조의 교체 과정에서 표면적인 모양새라도 좋게 유지한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헌제부터 조비로 이어지는 선양은 역시 평화로운 왕조 교체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후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사마염]]의 위 → 진의 교체 역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례를 모범적인 권력 승계로 여기는 사관도 있었다. 조환 역시 위나라 치하에서의 헌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조환은 265년에 양위하여, 303년까지 진류왕으로서 생존하였다.] 물론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진의 건국은 옛 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옛 왕조라고 좋아서 권력을 넘겨줄 리야 없겠지만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질서를 건립하는 일을 무조건적으로 찬탈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 [[송(육조)|유송]](劉宋)의 마지막 황제 순제 [[송순제|유준]]은 죽을 때 "다음 생에는 절대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기를!"이라고 부르짖었다.[* 아이러니한 건 선양을 하고 물러난 황제를 죽이는 전통이 유송의 건국으로 시작된 점이다. [[유유(송무제)|유유]]가 유송을 건국, [[동진]]을 멸망시키면서 [[진공제|공제]](恭帝)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자마자 죽여버렸다. 이후 등극한 왕조들은 유유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아 실행한 것일 뿐이다.] 왕조 교체 과정에서 하도 유혈 사태가 난무하는 중국사에서 헌제의 무난한 선양 과정은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 이후의 훈훈한 선양은 [[후주 공제|후주(後周) 공제(恭帝)]]와 [[송태조]] 조광윤의 케이스가 있다. 이외 [[이민족]] 왕조의 경우에도 대체로 전 왕조의 구성원들을 살려주고 때로는 우대했다. 하지만 이쪽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정통성을 갖고 형식상으로는 선양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실상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 참고로 이런 조치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계속되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도 그럭저럭 우대를 받으며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헌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한나라 황실의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후한의 황제는 13명이 있었는데 이 중 35세를 넘어서까지 생존한 황제는 헌제를 포함하여 단 3명뿐이다. 후한 황제들의 평균 즉위 연령은 약 13세이며 사망 연령은 29세, 재위 기간은 12년 정도였다. 그나마 이건 초대 광무제와 2대 명제가 있기 때문이고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더욱 비참했다. 다시 말해서 광무제와 명제를 제외하면 '''후한의 황제들은 평균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황제에 올라 약 10년간 보위에 앉아 있다가 30세 정도가 되면 죽음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유아 시절에 일단 보위에 앉았다가 사리를 분별할 법한 나이가 되면 제거당하는 소년 황제 시대가 100년간 이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중 2명은 '''확실하게''' 신하의 손에 죽었다. 황제가 제 구실을 못 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은 언제나 환관과 외척들의 정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즉, 헌제가 즉위할 당시에 이미 한나라 황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라꼴이 막장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사회 곳곳에서 한나라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대규모 농민 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후한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이들을 진압한 후에는 그 과정에서 성장한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다. 이 시점에서 중앙의 권력은 더욱 위축되어 사실상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언은 조공을 끊고 황제의 의식주를 사용하는 등 일찍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원술은 형주 북부 남양에서 황제를 자칭했으며, 기주의 원소는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 했다.[* 헌제 역시 동탁의 괴뢰 정권에 추대되었다는 정통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옹, 양주는 184년, 187년에 이미 한수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을 정도로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고, 한수는 10년 후에 마등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에는 [[유언(삼국지)|유언]]의 아들이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던 지방 군벌은 [[유우(삼국지)|유우]]를 제외하면 표면적으로나마 우호적이었던 정권 초기의 조조와 남양주의 손책, 그리고 유비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는 이후 권신이 되어 그 아들이 한을 멸망시켰고, 요절한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도 훗날 칭제했으며, 유비도 결국은 칭제를 했다. 후한의 권위가 이 지경이 된 것이 헌제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이런 굴욕도 없다. 현대에 이르러 시민 사회가 성립되고 더 이상 전제 군주제적인 역사관에 얽메이지 않게 되면서 선양에 대한 시각도 점차 바뀌었다. 이를 군주에 대한 신하의 찬탈로 보는 시각에서 점차 권력이 교체되는 변혁으로 보는 관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후한은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난세를 종식시킬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군주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으나 현대적 사관은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조비의 선양은 5호 16국이라는 난세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낮게 평가받지만, 명분은 행위 이전에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지 선양 이후 백수십여 년간 벌어진 인들로 선양의 명분을 논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다.[* 그런 식의 평가라면 '''[[선양]]의 의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록 선양을 받아 신([[新]]) 왕조를 수립한 [[위(삼국시대)|위나라]]와 [[서진|진나라]]가 삼국 통일 후 금방 멸망하여, 조위의 선양이 [[오호십육국]]이라는 [[난세]]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선양 당시 조비 치하의 위는 후한 말의 혼란기보다는 적어도 더 안정되어 있었고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던 단계였다. 그리고 '''"[[조조]]가 [[난세]]를 열었다."'''는 말 또한 설득력이 없는 것이 5호 16국 시대는 조조 사후 80년도 더 지나서 시작된다. 오히려 난세는 조조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조조가 보여준 일련의 정책들은 후한 말의 혼란을 수습하고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한 황실의 권위 추락도, 중국의 난세도 이미 조조 이전에 시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진 이후의 혼란기까지 조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간에서는 조조를 감정적으로 악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학계에서는 그 업적과 위진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자]] 역시 [[주나라]]가 이미 땅에 떨어지다 못해 맨틀에서 허우적거리던 [[춘추전국시대]]에 '''"[[주나라]]로 돌아가자."'''고 외친 인물이다. 그밖에도 당시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 원래대로 하자는 의견이 강경해지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라 불리는 것이다. 한나라 정통주의를 너무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