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제 (문단 편집) == 평가 == 이미 한나라는 그가 즉위하기 전부터 망조가 들어있었고, 9살의 어린 나이에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하여 선양할 때까지 꼭두각시 신세였기 때문에 그가 뭘 해보기도 어려웠고 황제로서 자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그가 산양공으로서 매우 어진 통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계속되는 환란과 [[동탁]], [[조조]] 등의 집권, [[환제(후한)|전임]] [[영제(후한)|황제]]들의 실정으로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동탁의 추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제위에 오른 헌제의 정통성은 [[원소(삼국지)|원소]]가 황제를 갈아치우려 할정도로 매우 낮았으며 실권도 사실상 전무했다. 그러나 헌제 본인이 무능하고 용렬한 군주였다면 그저 이런 상황에 순응했겠지만 분명히 '''한 황실을 살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왕윤]]의 주도가 있긴 했지만 [[여포]]를 부려 동탁을 주살하고,[* 이때 헌제는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였다. 그 어린 나이에 동탁처럼 잔인하고 병력까지 꽉 쥐고 있는 사람을 주살하는 명령을 내리는 게 웬만한 두뇌 회전과 담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이각]]과 [[곽사]]에게 빼앗기긴 했으나 자신의 말을 팔아 쌀을 사서 백성들을 먹이려는 노력도 하고, 빈털터리로 장안을 탈출해 이각과 곽사를 견제한 후 조조와 손을 잡아 그 둘을 몰락시키거나, 나중엔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주살하고자 수차례 [[암살]]과 [[친위 쿠데타]]를 꾀하는 등 '''아득바득 [[후한]]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고난을 마다않고 장안을 탈출해 황제의 신분인데도 개고생을 하면서 황실의 복권을 꿈꿔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파트너 선정이 그 야심만만한 조조였다는 점이 패착 아닌 패착. 다만 이때 헌제에게는 달리 파트너 선택권이 없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이각 곽사 같은 인간 말종들 손아귀에 계속 있을 게 아니라면 일단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긴 잡았어야 했는데, 당시 제후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춘 [[원소(삼국지)|원소]]는 애초에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유우(삼국지)|유우]]를 새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가 유우에게 거절당한 전력이 있고 본인도 황제가 되려는 마음을 품고 주부 경포를 시켜서 칭제를 권하는 자작극을 꾸미기 까지 했던 인물이라 뭔가를 기대하는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유표]]와 [[유언(삼국지)|유언]]도 마찬가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진 종친들이기에 칭제만 안 할 뿐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만들거나 황제의 권한인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헌제 입장에서는 피꺼솟 할만한 짓을 여러번 했고 그 결과 아예 헌제 본인이 유표를 토벌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을 정도라 그들이 헌제를 도울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그들의 뒤를 이은 [[유장(삼국지)|유종]]이나 [[유장(삼국지)|유장]]도 애비보다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 이라 뭔가를 기대할 상황도 아니었다.[* [[유종(삼국지)|유종]]은 뭔가 해볼 기회도 의지도 없었고, [[유장(삼국지)|유장]]은 그를 익주목으로 추대한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서 궁지에 몰리거나 자신보다 세력도 작은 한중의 [[장로(삼국지)|장로]]에게 핍박받는 등 무능의 극치였다. 이들은 헌제를 돕기는커녕 이들 본인부터 조조나 유비의 힘을 빌리고 싶어할 정도로 한심한 처지였고 결국 각각 조조와 유비에게 삼켜지고 만다. 그나마 둘다 목숨만은 건진 게 위안.] 그나마 황족 중에서 헌제를 도울수 있던 이는 [[유총(진민왕)|유총]]이 있었지만 그도 딴마음을 먹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그가 헌제가 접촉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유총마저도 197년에 원술에게 [[암살]]당하면서 황족들 중 헌제를 도울만한 이는 [[유비]]만이 남게 되었으나 그도 후술되듯 헌제를 쉽게 도울 수가 없었다. 당시 제후들 중에 조조를 제외하면 오직 [[원술]]이나 [[손책]]만이 헌제를 '''협천자'''를 하고 싶어했는데, 원술은 한때 친(親) 헌제파 처럼 보였으나 [[마일제]] 억류 사건 등으로 조정에 찍힌 후 결국 협천자 레이스에서 탈락했고 [[서주(중국)|서주]] 정벌에 실패하자 될대로 되란 식으로 진짜 황제에 올라 말 그대로 역적이 되어버렸고 나중에 완전히 말아먹고 원소에게 읍소하는 처지로 전락한 만큼 애초부터 뭔가를 기대할만한 인간이 아니였고 또 다른 야심가 손책은 조조의 세력에 막혀 협천자를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조가 협천자를 행한 해가 196년인데 손책은 197~8년에야 원술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으며 손책 또한 조조 못지않은 야심가고 상당히 잔인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적어도 복황후는 물론 임신한 동귀인까지 싸그리 죽이는 도살자 조조 밑에 있을때보다야 나을 수는 있어도 거기로 갔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얼마 안가서 손책은 죽고 손권이 뒤를 잇는 만큼 또 모를 일이다만 [[손권]]도 [[이궁의 변]] 등에서 알수 있듯 한 성질하고 생각보다 잔인 했으며 손책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느라 바빴기에 당장은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 역시 훗날 황제에 오르는 만큼 헌제가 거기에 갔어도 마냥 편안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답이 안보일 정도로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헌제에게 호의적일 사람은 유우나 유비가 있었는데, 유우의 경우 헌제 입장에서 크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고 충성심도 입증 되었으나 진작에 [[공손찬]]에게 죽었으며, 유비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니 유비가 헌제를 받아들였다면 당연히 조조 밑에 있을 때 보다야 훨씬 낫고 서로에게 윈윈이겠으나 유비의 당시 근거지는 서주인데, 서주는 [[서주 대학살]]로 상황이 말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신의 없기로 소문난 [[여포]]가 자신을 받아준 유비의 통수를 쳐서 서주를 삼키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직접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유비는 소패조차 떠나야 했기에 협천자니 뭐니 할 상황이 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원소나 유표에게 의탁하는 등 한동안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던 처지라 헌제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즉 조조 말고는 헌제에게 관심가지거나 헌제를 도와줄 만한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 개인적으로도 백성을 생각할 줄 알고 총명한 모습도 보여준 바가 있다. [[군자|본인이 가장 힘들 때에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구휼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유가(제자백가)|덕으로 통치한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군주]]의 [[명분]]에 있어서는 떨어질 게 없었다. 흔히 암군으로 알려진 이들 가운데서 국정능력은 별개로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낌없이 구휼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의 [[인조]], 프랑스의 [[루이 16세]] 등. 물론 저 둘은 왕권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실정을 해 [[암군]]이라 불리는 존재들이고, 헌제는 황실의 힘 자체가 증발해 뭔가 해볼 기회도 없었으므로 암군이라고 단정짓긴 애매한 존재다.] >가을 7월 임자일(7일), 태위(太尉) 주준(朱儁)이 면직되고 무오일(13일), 태상(太常) 양표(楊彪)가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 >삼보(三輔)에 큰 가뭄이 들어 4월부터 이달까지 계속되었다. 황제가 정전(正殿)을 피하며 비 내리기를 청하고 사자를 보내 수도(囚徒)[* 죄수]를 정리하여(洗) 경계(輕繫)를 사면했다. 당시 곡식 1곡(斛)의 가격은 50만 (전), 콩과 보리 1곡의 가격은 20만 (전)에 달하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백골이 (길거리에) 쌓여 있었다. > >황제가 시어사(侍 御史) 후문(侯汶)를 시켜 태창(太倉)의 쌀, 콩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미죽(糜粥)[* [[죽]]이나 [[미음(동음이의어)#s-2|미음]]]을 만들게 했으나 하루가 지나도 굶어 죽는 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황제는 부휼(賦卹)[* 진휼,구휼]하는 데에 농간이 있지 않나 의심하니 친히 어좌(御坐) 앞에서 죽을 만드는 것을 시험해보고는 이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시중(侍中) 유애(劉艾)를 보내 유사(有司)[* 담당 관리]를 꾸짖게 했다. > >원굉기(袁宏紀) – 이때 시중(侍中) 유애(劉艾)에게 명해 쌀과 콩 5승(升)으로 임금 앞에서 죽을 만들도록 하니 세 그릇에 가득찼다. 이에 상서(尙書)에게 말했다, “쌀과 콩 5승으로 죽 세 그릇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쇠약해지니 어찌된 일인가?” > >그러자 상서령(尙書令) 이하 모든 관원들이 성각(省閣)[* 궐문]으로 나아와 사죄하고 후문(侯汶)을 붙잡아 실태를 조사하도록 주청하니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차마 후문을 이관(理官)에게 넘길 필요는 없고 장(杖) 50대로 가하다.” 이때 이후로 많은 이들이 온전히 구제되었다. >---- >후한서 효헌제기 또한 미디어 매체에서 조조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조에게 일갈하는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바도 있다. >헌제는 허현으로 도읍을 옮긴 후로부터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곁에서 모시는 숙위병(宿衛兵)[* 궁궐에서 숙직하면서 지키는 병사.]조차도 조조의 일당이거나 옛 인척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의랑 조언(趙彥)이 황제를 위하여 그에 대한 시책을 진술하여 말했으나, 조조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했으며, 그 밖에 궁 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주륙을 당하였다. 나중에 조조가 이 일로 인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오니, 헌제가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 >"그대가 만약 능히 나를 보좌 할 수 있다면 두텁게 대해주고 그렇지 않다면 청컨대 은혜를 베풀어 나를 폐하시오." > >조조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깥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옛 의례에 따르면, 삼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 황제를 조견할 때에는 호분이 칼을 들고 그 양옆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 조조가 바깥으로 나와서 좌우를 돌아보니 식은땀이 등에 한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 >조조가 그 후에는 감히 다시 조견을 청하지 않았다. >---- >후한서 헌제복황후전 다만 그 결과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고, 대세는 이미 새 왕조 개창에 기울어 결국 한은 망국을 맞이했다. 이런 면에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고 믿을 만한 충신 한둘을 믿고 나라의 수명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기고 만 고려의 마지막 군주 [[공양왕]]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여하튼 자신의 뜻을 펼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동탁과 이각 & 곽사, 조조, 조비 등의 권신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지라,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암군]]인지 [[성군]]인지에 대한 떡밥도 간간이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조조가 악인으로 취급받은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헌제가 암군이었다면 조조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조조가 권력을 꿰찼으니 애매하게 된 것. 그나마 황제 시절의 모습을 보면 적어도 [[환제(후한)|환제]], [[영제(후한)|영제]] 같은 이들보다는 개념인이었을 것으로 보이긴 한다. 물론 이 2명이 [[환령]]이라 엮일 정도로 개막장이기는 했지만. 사재를 내어 시도한 구휼물자마저도 이각에게 강탈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삼보의 난 무렵 본인의 명마를 팔아 구휼을 시도했던 점을 보면 기본적으로 통치를 잘 해볼 의지 자체는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인 영제의 실정이 이미 겹친 데다가 의붓외숙부인 하진이 지방의 군벌들을 입성시킨 채로 참살을 당하는 바람에 동탁이 실권을 장악했으며 동탁이 시행한 화폐정책의 실패로 인해 경제정책은 꼬였고 반동탁연합의 결성 및 낙양 초토화와 장안으로의 천도로 인해 지방통치는 와해되었으며 그나마 기대해볼 만했던 신하인 왕윤은 동탁의 잔당 처리 문제에서 실패하였고 이각과 곽사는 삼보의 난을 일으키는 등 본인이 뭘 해보기도 이전 이미 최악의 환경이었다. 오히려 서자에 차남으로 태어나 체계적인 제왕학을 교육받지 못한 채로 불과 만 8세경 즉위해 11세에 동탁을 주살, 14세에 삼보의 난의 참상을 겪어 가며 장안을 탈출한 것 등을 생각하면 본인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구휼 담당 관리의 비리를 본인의 능력으로 적발해 내기도 했고. [[영제(후한)|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가 크다면 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선대인 영제 치세시기부터 [[십상시]] → [[동탁]] → [[이각]]과 [[곽사]] → [[조조]]로 이어지면서 계속 강력한 군웅들에게 눌려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비운의 황제였다. 마지막 황제이지만 멸망의 책임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며, 후한의 군주로서는 분명 최선을 다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동탁이 사망했던 그 시점에서 한나라는 재건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간신이자 악적(惡敵)인 [[가후]]가 서량으로 야반도주하려던 [[이각]]과 [[곽사]]에게 '''[[관군]]과 맞서 싸워라'''라는 얼척 집 나간 권유를 했고 그 권유를 [[이각]]과 [[곽사]]가 받아들여서 그들이 관군을 무찌르고 [[서영(삼국지)|서영]]을 전사, [[여포]]를 도주, [[왕윤]]을 [[참수]]시켰을 때 한나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이 이후 [[이각]]과 [[곽사]]는 전횡이란 전횡을 일삼아 그 사람 많기로 유명한 대도시 장안을 '''전부 다 죽여서'''(또는 저 멀리로 도망가서) 허허벌판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그 많던 문무백관들이 몇명 되지도 않게 아주 완전히 초토화를 시켜 놓았다. 이때 헌제가 천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었냐 하면 [[삼보의 난]]을 피해 도망칠 때 너무 세력이 없어서 [[백파적]] 나부랭이한테 구조 요청을 해야 할 정도로, 끔찍할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천자임에도 길도적 나부랭이한테 도와달라고 빌 정도로 헌제는 아예 세력 자체가 없는 상태였으며 [[조등|의붓 할아버지]]의 후광이 엄청 빵빵한 [[조조]]는 이렇게 쪼그라들어버린 헌제를 너무 쉽게 가로챈 것이다. 제대로 된 시대에 천자가 되었더라면 상당한 성군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헌제 유협이다. 허나 그가 즉위하던 시기는 이렇게 나라가 시궁창이 된 이후라 이건 누가 천자가 된다 하더라도 재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지경이다. 수도는 너무 많은 살육이 벌어져 반쯤 [[유령도시]]화 되었고 지방관이라는 놈들은 그 자리를 돈 주고 사다가 [[조병갑]]이 울고 갈 수준으로 백성들을 탈탈 털어먹고 되파는 짓을 반복했으며[* 심지어 이 짓거리를 [[영제(후한)|자기 아버지]]가 생전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시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런 탐관오리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에게 돈 주고 벼슬 샀다는 것이다.] 황족이나 귀족이 참칭을 하는 지경까지 갔다. 특히 친척 어르신인 [[유표]]에게 철저히 버림받았으며 친족이라는 인간 치고 헌제의 편에 서 준 사람이라고 해 봐야 [[유비]]와 [[유우]] 단 두 사람 뿐이었다. 이건 어떻게 봐도 [[아비규환]] 그 자체인 것이다. 한마디로 [[지옥]]을 이승 수준으로 되돌려 놓는 건데 그게 그렇게 쉬울 리는 없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