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당) (문단 편집) ===== 제1차 번진 제압전 - 중소 번진 토벌(806~807) ===== [[번진]]들을 제압하기로 결심한 헌종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검남서천[[절도사]] '''유벽'''이었다. 그는 헌종이 즉위하자마자(806년) 검남서천절도사, 검남동천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직을 겸임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강요했다. 이는 [[쓰촨 성|사천]]의 대부분 지역과 [[형주]] 서쪽 일부를 장악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헌종은 이를 거부하고 토벌령을 내렸으며 좌신책행영절도사 고숭문[* 황소의 난 당시 [[최치원]]의 상관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고병]]의 할아버지이다.], 신책경서행영병마사 이원혁을 토벌군으로 편성하여 산남서도절도사 엄려와 협조해 유벽을 토벌하도록 했다. 유벽의 반란 평정은 빨랐다. 유벽은 그리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가 아니었기에 아직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지지 않은 [[금군]]만으로도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다. 관군은 험지를 기반삼아 곳곳에 관문을 쌓고 버티는 유벽의 군대를 연파하여, 9월에 [[청두|성도]]를 함락시키고 유벽을 잡아 물에 빠트려 죽였다. 유벽이 이때 그나마 있는 군대를 10,000명 단위로 나누어 놓았기에 평정이 빨랐다. 또한 하수절도사 한전의를 압박해 입조하게 했고, 그의 생질인 '''양혜림'''이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독립하려 하자 하동절도사와 천덕군절도사를 움직여 이를 토벌했다.(806년) 이 소식을 들은 다수의 번진들이 장안에 들어가 조현하기를 요구하면서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았다. 진해절도사 '''이기''' 또한 그중 한 명으로, 807년 여름,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청을 했다. 그러나 이기는 실제로는 입조할 생각이 없었다. 입조를 환영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온 칙사와 유후판관 왕담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얼마 안가 병을 청하며 연말에 입조하겠다는 연기 청원을 했다. 이에 헌종은 조서를 내려 그의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이에 이기는 반란을 계획했다. 이기는 결국 10월, 왕담을 죽이고 칙사를 협박한 데다가 명목상의 이유로 조정에서 임명한 6개 [[주(행정구역)|주]]의 [[자사]]를 제거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헌종은 어사대부 이원소를 진해[[절도사]]로, 회남절도사 왕악을 초토처치사로 삼아 여러 번진의 병사들을 규합해 이기를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 토벌전은 시작부터 향촌의 자제들이 이기의 부하들을 습격해 죽이는 등 진해 번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1개월이 채 안 되어 이기 자신까지 부하들에게 잡혀 [[장안]]에 압송된 후, 아들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지면서 마무리되었다. 다만 [[연좌제]]에 걸린 건 그의 아들뿐이었고, 그의 사촌이나 형제들은 모두 이전에 공을 세운 자들[* 이기는 엄연한 [[당나라|당 왕조]]의 '''[[황족]] 중 한 명'''으로, 그의 선조는 [[태종(당)|태종]] 이세민의 숙부인 이신통이었다. 그는 황족일 뿐만 아니라 조카인 태종의 목숨도 구한 적이 있었고, 당나라 건국시에도 여러모로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회안정왕'의 [[시호]]를 받았다. 거기다가 이기는 [[안사의 난]] 도중에 당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국정의 아들이기도 했다. --[[호부견자]]?--]이었기에 관직을 깎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헌종은 이로써 즉위하자마자 3개 번진의 반항을 차례로 제압했다. 이에 부정기적으로 상공하면서 눈치를 보던 다수의 번진들이 당 조정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후 제2차 번진 제압 시도가 이루어지는 809년까지 헌종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금군을 확충했으며, 이는 2차, 3차 번진 토벌 기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15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금군인 '''신책군'''을 구축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