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당) (문단 편집) ===== 제4차 번진 제압전 - 평로치청 번진 토벌(818~819) ===== 오원제의 회서 [[번진]]이 평정되고, 왕승종의 성덕 번진이 항복하자 헌종은 [[하북]], [[산동]]의 반항적인 번진 중 가장 크고 강력하며 사실상 번진들의 중심축이었던 '''이사도'''의 평로치청 번진을 토벌하고자 계획했다. 평로치청 번진은 [[안록산]]이 최초로 절수직을 역임한 이래로 [[후희일]], [[이정기]]에 이어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진, 조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골수 [[반란]] 세력'''이었다. 거기다가 그 세력은 이정기 생전, 최대 15[[주(행정구역)|주]]에 달했고 이정기 사후에도 12주에 걸쳐 있었으며, 관외병과 아중군만 해도 100,000명에 달하는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화국계부》에 기록된, 조세도 바치지 않는 7개 번진 중 하북, 산동의 5개 번진(하북 3진, 회서, 평로치청)의 관외병, 아중군의 총합이 300,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 1/3이 평로치청 번진 소속이었다. 또한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이정기 이래로 평로치청 번진은 [[신라]], [[발해]]와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담당했다. 그 결과, 신라와의 교역 규모가 한층 활성화되면서 평로치청 번진은 부유해졌고, 발해와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다수의 마필을 획득하여 전력을 증강시켰다. [[안사의 난]] 이래로 한동안 하북 일대에는 군마의 씨가 말라서 여러 번진들 중에는 '''기병 대신 [[노새]]를 지급'''하기도 하는 가운데 '''홀로 발해산 마필을 다량으로 유지'''하고, 이를 동맹관계의 여러 번진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면서 전력을 강화한 평로치청 번진의 군사력은 번진들 가운데도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발해와 신라까지 개입된 국제전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물론 평로치청 번진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정기 이래로 평로치청 번진이 조정의 명을 듣지 않고 맞서 싸우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평로치청 번진이 물론 강대한 번진이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북 3진, 회서 번진, 산남동도 번진 등 여러 번진들과 연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헌종의 3차에 걸친 번진 토벌로 인해 위박 번진, 회서 번진, 성덕 번진이 귀순 또는 평정되었고, 노룡 번진과 직접적인 연계가 불가능해져 홀로 고립되었다. 평로치청 번진은 처음 단독으로 당의 토벌군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818년, [[이사도]]는 자신에게 닥처든 위기를 느끼고 기주, 밀주, 해주를 조정에 바치며 헌종의 토벌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사도는 천성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땅을 바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며 군을 동원했다가 다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수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인해 평로치청 번진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토벌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818년 5월, 헌종은 회서 번진 토벌에 공을 세운 충무[[절도사]] 이광안을 의성절도사로 임명하고, 회서절도사로 충임되었던 마총을 충무절도사·진·허·은·채주관찰사로 삼았으며, 7월에는 이소를 무령절도사로 삼고, 배도를 최고 사령관으로 삼아 이사도 토벌령을 발동했다.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번진이 최초 토벌령을 받은 번진이 되었고 신책군 또한 대규모로 종군했다. [[장보고]]가 이 토벌전에 종군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군 소장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령절도사 이소의 휘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헌종은 이사도 토벌을 위한 국제적인 여건 마련에도 힘썼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 약속을 받아냈고[* 이때 신라는 [[헌덕왕]]이었다. 30,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해 파견하겠다고 했지만 이사도 토벌이 끝난 후에야 편성이 완료되었다.] 발해를 회유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발해의 [[선왕]]이 이사도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고, 이후 당나라 측에서 고위 관직을 제수한 데다가 당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밀약이 있었던 듯 싶다. --그러니까 [[고구려]] 유민이고 자시고 국제 관계에선 별 의미가 없다.-- 이사도 토벌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한때 긴밀한 동맹이었던 위박 번진의 군대가 앞장서서 이사도군을 공격해 나갔고, 11월에는 이미 처소가 있는 운주에 40리 거리까지 전진해 보루를 쌓았다. 이사도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연전연패하여 도지병마사를 비롯해 수십 명의 장수들이 사로잡혔다. 무령절도사 이소 또한 11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면서 이사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사도는 처소인 운주의 방위에만 노력하여 여러 주의 구원 요청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819년 2월, 이사도의 도지병마사였던 유오가 이사도에 반기를 들고 휘하의 병력을 움직여 이사도와 그 두 아들을 체포, [[처형]]한 후 목을 잘라 바치고 항복했다. 이것으로 '''최대의 번진 세력이었던 평로치청 번진은 이정기 이래 4대 55년에 걸친 독립 세력으로써의 역사를 마치고 당헌종에 의해 평정되었다.''' 헌종은 평로치청 번진의 평정 소식을 듣고 12개 주를 3개의 번진으로 나누었다. 이사도의 친위 세력이었던 고구려 유민들이 거듭 반항하자 나누어진 번진을 임시로 관장하던 기해연밀도관찰사 조화는 이들 중 주요 인물 1,200여 명을 향연 도중 제거했고, 운주의 주민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켜 뒷처리를 마무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