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당) (문단 편집) === 말년의 헌종 === 헌종은 역사상 '''원화중흥'''이라 일컬어진 대대적인 [[개혁]]과 이를 통한 힘을 바탕으로 [[번진]]들을 무릎꿇리고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비록 하북 3진은 헌종 사후 다시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으나 이들 번진들도 [[당나라|당]] 조정과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는 헌종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료들을 상당히 후대했고, 서로 불화가 존재하는 관료들을 [[재상]]으로 동시에 임명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하게 조정을 운용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써 그의 권력을 지키는 데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로 헌종 사후 당나라의 [[황제]]들 중 그보다 더 강력한 황권을 보유한 황제는 없었다. 그러나 재위 마지막 해의 헌종은 이러한 균형 감각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파간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존의 관료층을 사족([[문벌귀족]]), 서족(과거로 임용된 문학자 집단)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했으며, 대신 황보박으로 대표되는 재정가들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이로 인해 두 세력은 모두 말년의 헌종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고, 이것이 역사적인 평가로 남아있다(...) 헌종이 변해버린 이유로는 단약 복용을 꼽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편견이 존재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헌종을 [[암살]]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이 최측근인 [[환관]] 세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강력한 황권을 가진 헌종이 뭔가 사람이 변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최측근들에게까지 위험하게 보였다는 데는 딱히 이견이 없는 듯 싶다. 특히 말년의 헌종은 단약의 과도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여기서 헌종은 정신질환이 심각해졌는데 조급증이 심해지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측근들이 황제의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성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헌종이 최측근인 환관들을 대상으로 이유없이 매를 때려 환관들이 가장 심하게 당했기에 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물론 재정가를 재상으로 기용했다는 데서 헌종이 다음 개혁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재정 확보에 주력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하나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헌종은 토돌승최라는 환관을 신임했는데 토돌승최는 또다른 환관 집단의 수장인 왕수징 및 양수경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헌종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이녕이 요절하자 둘째 이운과 셋째 이항 중에 누구를 황태자로 삼는가에 대해 대립했다. 헌종은 환관들의 압력에 못이겨 셋째 이항을 황태자로 내세웠는데 사실은 은밀하게 토돌승최와 모의해 둘째 이운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820년, 헌종은 급사했다. 부황인 [[순종(당)|순종]]처럼 왕수징 일파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무엇보다 왕수징 일파의 입장에선 헌종의 정신질환과 폭력을 견딜수가 없었다.], 토돌승최와 이운은 직후 제거되었다. 헌종은 '''당나라에서 환관에게 독살당한 세 번째 황제였다.''' 원화중흥을 이룩하고, 당나라에 마지막 100여 년을 버틸 힘을 부여했으며, 마지막 해의 변화만 없었다면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었던 황제의 죽음이었다. 제위는 3남 [[목종(당)|목종]] 이항이 계승했다. 목종의 세 아들, 즉 헌종의 손자인 [[경종(당)|경종]], [[문종(당)|문종]], [[무종(당)|무종]]은 차례로 [[요절]]했다. 무종의 뒤를 이은 [[선종(당)|선종]] 역시 그의 핏줄(13남, 서자)이었다. 선종 역시 훌륭한 왕재를 보였으나 결국 말년은 [[암군]]으로 마쳤고, 당나라는 완전한 [[멸망]]의 수순에 이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