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센 (문단 편집) == 역사 == 온난한 기후 덕에 기원전 5만년 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후로 [[켈트족]]이 이곳에 살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카티족이 이곳에 거주했다. 다만 정황상 이 카티족은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패배 이후 [[로마군]]에 의해 추방된 것으로 추측된다. ~~화풀이~~ 아직도 카첸푸르트(Katzenfurt)등 카티족의 이름을 딴 지명이 남아 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로는 [[프랑크 왕국]]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튀링겐]]과 통합된 하나의 땅이었다. 그러나 1247년, 튀링겐을 통치하던 루도빙거 가문의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며 루도빙거 가문의 대가 끊기자 하인리히 라스페의 누나 유타의 아들인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와 하인리히 라스페의 형 루트비히 4세의 딸인 브라반트 공작 부인 튀링겐의 조피가 서로 상속권을 주장하며 튀링겐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튀링겐은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가 대부분 가져갔으나 일부를 떼어 조피에게 주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헤센이다.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 1세]]가 [[마르틴 루터]]에게 뻑가면서 개신교로 개종했고,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와 더불어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유력 제후가 되었다. 필리프 1세는 자식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루터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행하여 헤센을 네 아들에게 나눠주었고 결과적으로 헤센 방백령은 맏아들 빌헬름 4세의 헤센-카셀, 둘째 루트비히 4세의 헤센-마르부르크, 셋째 필리프 2세의 헤센-라인펠스, 막내 게오르크 1세의 헤센-다름슈타트 네 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었다. 이 가운데 라인펠스와 마르부르크는 후사가 없어 장자계열의 헤센-카셀로 귀속되었으나 다름슈타트는 계속 후계를 이어가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가 살아남았다. 이 두 헤센은 영지 조정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으르렁거려 사이가 좋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마르부르크]] 같은 경우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가 서로 상속받기 위해 30년 전쟁 말엽에 가문간의 계승 전쟁을 벌여 헤센-카셀측이 가져갔다.]. 카셀은 [[루터교회]]에서 [[개혁교회|칼뱅주의 개신교]]로 개종했고, 다름슈타트는 루터교회를 고수했다. 서로 워낙 사이가 안좋다보니 [[30년 전쟁]] 기간에도 카셀은 [[개신교]] 진영을 지지하고, 다름슈타트는 [[가톨릭]] 진영을 지지했을 정도였다. 사실 이 당시만 해도 루터파와 칼뱅파 사이에 골이 깊었던 때라 루터회 도시가 가톨릭 진영에 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후 헤센-카셀은 1803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 결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줄 선 대가로 방백에서 [[선제후]]로 승격되었으며, 헤센-다름슈타트는 1806년에 [[헤센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헤센-카셀 선제후국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줄을 잘못섰다가 [[망했어요]]. 헤센-카셀 선제후국은 나사우 공국,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자유시]]와 함께 통폐합되어 헤센-나사우 구역으로 [[프로이센 왕국]]에게 편입당하면서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 헤센 지역의 명맥은 헤센-다름슈타트, 즉 헤센 대공국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실 헤센 대공국도 합병될 처지였으나 러시아 황후 [[헤센의 마리]]가 헤센 대공가 출신이라서 사위 [[알렉산드르 2세]] 덕분에 합병은 면하고 북부 홈부르크 지역만 북독일 연방에 강제 편입되었다. 북부지역은 명목상 헤센 대공의 통치령이었으나 [[북독일 연방]]의 맹주 프로이센에서 보낸 관료들이 통치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영토나 다름없었다. 헤센 대공국이 할 수 있는건 이제 얌전히 프로이센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열심히 후원한 데 이어서 직후 탄생한 [[독일 제국]]에 참가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프로이센에게 눌린 것 뿐만이 아니라 보불전쟁 직전 있었던 [[엠스 전보 사건]]이 독일 내 민족 감정을 폭발시켜서 자발적으로 프로이센을 후원한 면이 크다. 프로이센의 라이벌 [[바이에른 왕국]]에서조차도 보불전쟁 시기 프로이센을 돕자는 여론의 목소리가 드높았을 정도이니.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독일 내 다른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헤센 대공국도 폐지되고 공화정 형태의 연방 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 존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프랑스군]]과 [[미군]]이 이 지역의 점령군으로 주둔하게 되는데, 프랑스가 점령하였던 라인헤센 지역은 서독의 건국과 함께 [[라인란트-팔츠]] 주로 편입되었고, 미군이 점령하였던 헤센-다름슈타트와 헤센-나사우 지역은 통합 헤센(Groß-Hessen) 지역으로 합쳐졌다. 이 통합 헤센 지역이 바로 오늘날의 헤센 주. 헤센 주 동부의 풀다(Fulda) 지역은 냉전 시절 군사적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풀다 시 자체는 옛 동독-서독 국경지대에 인접한 한적한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이 곳은 독일 본토 전체를 아우르는 교통의 요지였다. 만약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군이 유럽을 공격할 경우 진격로의 핵심은 당연히 독일 본토가 되는데, 그 독일 본토의 진격로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루트가 바로 이 풀다였다. 풀다를 통과하면 바로 서독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와 근교의 [[람슈타인 공군기지]], [[라인강]]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사실 풀다 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의 거리는 [[휴전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멀지만 서울의 경우 중간에 [[임진강]]이라는 천연 방어선이 있는 반면, 이 쪽은 천연 방어선 역할을 할만 한 지형이 딱히 없다.], 프랑스, 벨기에 등 서유럽 지역으로 진격하는 루트 중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 이 풀다를 통과하는 루트였다. 이 때문에 풀다를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그래서 이 진격로를 두고 풀다 갭(Fulda gap)이라는 용어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