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마우스/콘텐츠 (문단 편집) ==== 라운드 1: [[역사]]편 - 한국 현대사 ==== * '''[[https://youtu.be/HIi2JDuw86U|[성제준 1부 上] 설민석이 역사왜곡? 거짓말쟁이는 누구일까?]]''' 업로드 날짜 : 2019년 10월 12일 깔 게 너무 많아 [[이말년씨리즈|분량조절에 실패해서]] 부득이 상하편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성제준의 “1950년 한국은 80% 가까이 되는 문맹률을 기록했으며, 이들에게 민주주의 개념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에, 헬마우스는 1953-54년의 문맹률 자료를 제시하며 26%나 14%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문맹률이 80%대였던 것은 1945년이며, 이는 민족말살 정책과 초등교육기관 부족으로 문맹률이 치솟았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민간단체의 문맹퇴치운동의 결과로 빠른 시간에 문맹률이 낮아진 상황이라 설명한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헌법/역사#s-3.1|임시헌장]] 제1조의 민주공화제 규정, 전쟁 중에도 [[제2대 대통령 선거|선거]]를 실시한 사실[* 이후 하편에서 성제준의 주장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서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때의 투표율 95.5%를 추가로 제시했다.]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투표용지]]는 일본의 기명식 투표와는 달리 도장을 찍는 방식이므로 문맹률이 투표율에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적다고 반박했다. 한편 성제준은 2011년 대법원의 [[조봉암]]에 대한 무죄 판결을 두고 “검찰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다, 여러 해석이 있다”며, 조봉암을 [[박헌영]], [[여운형]] 등과 어울린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으로 자신의 사견을 대법원 판결 비판에 갖다대는 행태를 비판하는 한편,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그룹과 교류했음을 들며 "이승만도 여운형과 어울렸는데 간첩이냐"고 반박했다. 게다가 조봉암은 당시 조선 좌파 입장에서는 변절자에 가깝다고 평가하면서, 조봉암이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당한 뒤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갈아탔으며, 좌익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모두 출마를 거부한 1948년 총선에 조봉암이 출마해서 당선된 것과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된 사실을 제시하였고, 특히 조봉암이 실시한 [[농지개혁]]은 부의 재분배를 실시하여 남한이 사회주의에 흔들릴 가능성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성제준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 "공식적으로 공판 검사가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 사법적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 '''[[https://youtu.be/8gnltRgOU2k|[성제준 1부 下] 없는 단어를 만들어서까지 역사왜곡과 가짜뉴스를?]]''' 업로드 날짜 : 2019년 10월 13일 “6.25 전후로 평화통일을 주장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자였다"는 성제준의 주장에 대해,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서의 발언 등 이승만 또한 평화통일을 대외적으로 주장했다는 사실을 통해 반박한다. 또한, 조봉암의 진보당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도, 진보당이 "6.25의 책임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명령에 따른 공산역도에게 있다[* 당시에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지시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대세였으나, 현재는 나중에 공개된 소련의 기밀문서를 근거로 김일성이 주도했고 스탈린이 승낙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주장에 힘이 더 실리고 있다. 다만 어느 쪽도 확고한 정설은 아니다. [[6.25 전쟁/전쟁 발발|문서]] 참고.]"고 주장한 사실을 제시하며 반박한다. 또한 진보당 강령 4항의 내용인 "민주 세력의 대동단결, 민주 우방과 긴밀히 제휴, 민주 세력의 결정적 승리, 평화적 방식의 조국통일" 등을 제시하며 "여기에 어디 사회주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부마 항쟁에 대한 설민석의 강의를 ‘역사왜곡’이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역사적 합의가 다 끝난 것"이라고 하면서 [[천안함 피격 사건]]에 성제준의 논리 구조를 똑같이 대입하는 방식으로 반박했다. 또한, 가두시위라는 단어를 어렵게 해석하여 이를 폭력적 시위로 프레이밍하고 진압이 정당하다는 식의 말을 태극기 집회에 대입해 반박한다. 마지막으로, 성제준이 ‘공과(功過)’라는 단어를 ‘공과 사’로 쓴 것을 지적당하자, 이를 고치기는 커녕 '''‘사별성’'''이라는 단어를 창조한 것을 비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제준TV/비판 및 논란#s-4.2|해당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